선거는 흔히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한다.
그런데 2007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라는 가장 큰 '축제'를 앞두고도 분위기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후보자 수는 사상 최대이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쏠려 있을 뿐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선거 때는 보통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사가 각각의 공직 후보자를 매개로 표출된다.
유권자들이 대화와 토론 및 설득의 과정을 거친 뒤 그 중 한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으로,이는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이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축제'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한다는 '민주주의적 형식'이 곧바로 올바른 정치라는 '내용'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게 그동안의 역사와 경험이 알려 준 교훈이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몸을 낮춰 대중에게 아부하다가도 선거가 끝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선심성으로 남발한 공약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다.
한때 이를 바로잡는다며 총선시민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결성돼 부적격 정치인들을 낙선시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뽑힌 '새 인물'들도 구태 정치인들과 똑같이 타락하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는 '노사모' 등이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인 현실 정치 참여를 내세우며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이른바 '참여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5년 동안 그들 중 일부가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에 '참여'했을 뿐,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그토록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이 이제는 선거를 앞두고도 '축제는 없다'며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대안 찾아야 하나
그렇다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버리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사실 민주주의가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인류가 고안해 낸 정치 체계 중 '가장 나쁘지는 않은,즉 차악의 제도'이기는 하다.
인류가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서구의 시민혁명 이후부터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시민이 '민회'라는 공론의 장에 나와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설득하면서 공동의 의사를 도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어서다.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 또한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반 쪽짜리였지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성인 남자들만의 민주주의였으며 여자와 노예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또 노예 노동력에 기인한 경제적 번영과 인근 점령지로부터 거둬들인 공물이 민주주의 제도를 떠받치는 경제적 밑바탕이 됐다.
이 같은 기반이 무너지자 '그들만의 민주주의'도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정치 체제로는 군주정과 귀족정이 있다.
군주정이란 한 사람의 왕이 최고 권력을 가지는 시스템을 말한다.
군주가 '신의 아들'이라는 종교적 감정 또는 '나라의 아버지'라는 국민 감정 등을 밑바탕에 깔고 국가의 통치 행위를 중립적 권력에 맡겨 버리는 게 더 공정할 수 있다는 이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가의 작용이 복잡해진 시기에 군주정을 채택하는 것은 어렵다.
현실 세계에 남아 있는 군주도 그 실권이 완전히 소멸됐고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귀족정은 세습적(世襲的)·신분적(身分的) 특권 계층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플라톤은 도덕적이고 지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귀족에 의해 지배되는 법치 국가가 실현 가능한 최상의 국가 체제라고 말했다.
귀족정에 대한 이런 평가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 등의 시민 혁명을 지나오면서 자유와 평등이 핵심적인 정치 이념으로 떠오르자 이론적 근거를 잃고 말았다.
다만 귀족 정치가 가진 정치적 안정성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귀족의 자격 요건을 '혈통'으로 보는 '자연적 귀족제'는 불가능해도 '천부의 재능'을 기준으로 뽑은 엘리트 계층에 의한 정치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 귀족정이 갖는 가치를 근대에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서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
이처럼 정치가 발전해 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봐도 '보통 선거권'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지만 민중에게 권리를 돌려 주면 다 잘될 것처럼 믿는 것은 곤란하다.
오늘날 좌·우 이념을 가릴 것 없이 대다수 국가에서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 같은 독재자도 겉으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뽑힌 지도자였다.
김정일 1인 지배 체제를 가진 공산주의 국가 북한도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일 정도다.
이처럼 전혀 민주적이지 않아 보이는 국가에서도 적어도 형식적·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 제도들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들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올바른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수단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국민들 모두가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은 경우 민주주의가 오히려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독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선심성 정책을 펴다가 경제를 파탄 낸 남미의 포퓰리즘,선거를 통해 독재자를 옹립한 히틀러 시대의 독일 등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역사를 퇴행시킨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
그런데 2007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라는 가장 큰 '축제'를 앞두고도 분위기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후보자 수는 사상 최대이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쏠려 있을 뿐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선거 때는 보통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사가 각각의 공직 후보자를 매개로 표출된다.
유권자들이 대화와 토론 및 설득의 과정을 거친 뒤 그 중 한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으로,이는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이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축제'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한다는 '민주주의적 형식'이 곧바로 올바른 정치라는 '내용'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게 그동안의 역사와 경험이 알려 준 교훈이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몸을 낮춰 대중에게 아부하다가도 선거가 끝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선심성으로 남발한 공약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다.
한때 이를 바로잡는다며 총선시민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결성돼 부적격 정치인들을 낙선시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뽑힌 '새 인물'들도 구태 정치인들과 똑같이 타락하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는 '노사모' 등이 인터넷을 통한 적극적인 현실 정치 참여를 내세우며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이른바 '참여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5년 동안 그들 중 일부가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에 '참여'했을 뿐,대다수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그토록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이 이제는 선거를 앞두고도 '축제는 없다'며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대안 찾아야 하나
그렇다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버리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사실 민주주의가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인류가 고안해 낸 정치 체계 중 '가장 나쁘지는 않은,즉 차악의 제도'이기는 하다.
인류가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서구의 시민혁명 이후부터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시민이 '민회'라는 공론의 장에 나와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개진하고 설득하면서 공동의 의사를 도출하는 제도를 갖고 있어서다.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 또한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인민의 지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반 쪽짜리였지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성인 남자들만의 민주주의였으며 여자와 노예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또 노예 노동력에 기인한 경제적 번영과 인근 점령지로부터 거둬들인 공물이 민주주의 제도를 떠받치는 경제적 밑바탕이 됐다.
이 같은 기반이 무너지자 '그들만의 민주주의'도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정치 체제로는 군주정과 귀족정이 있다.
군주정이란 한 사람의 왕이 최고 권력을 가지는 시스템을 말한다.
군주가 '신의 아들'이라는 종교적 감정 또는 '나라의 아버지'라는 국민 감정 등을 밑바탕에 깔고 국가의 통치 행위를 중립적 권력에 맡겨 버리는 게 더 공정할 수 있다는 이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가의 작용이 복잡해진 시기에 군주정을 채택하는 것은 어렵다.
현실 세계에 남아 있는 군주도 그 실권이 완전히 소멸됐고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귀족정은 세습적(世襲的)·신분적(身分的) 특권 계층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플라톤은 도덕적이고 지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귀족에 의해 지배되는 법치 국가가 실현 가능한 최상의 국가 체제라고 말했다.
귀족정에 대한 이런 평가는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 등의 시민 혁명을 지나오면서 자유와 평등이 핵심적인 정치 이념으로 떠오르자 이론적 근거를 잃고 말았다.
다만 귀족 정치가 가진 정치적 안정성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귀족의 자격 요건을 '혈통'으로 보는 '자연적 귀족제'는 불가능해도 '천부의 재능'을 기준으로 뽑은 엘리트 계층에 의한 정치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 귀족정이 갖는 가치를 근대에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서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
이처럼 정치가 발전해 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봐도 '보통 선거권'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지만 민중에게 권리를 돌려 주면 다 잘될 것처럼 믿는 것은 곤란하다.
오늘날 좌·우 이념을 가릴 것 없이 대다수 국가에서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 같은 독재자도 겉으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뽑힌 지도자였다.
김정일 1인 지배 체제를 가진 공산주의 국가 북한도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일 정도다.
이처럼 전혀 민주적이지 않아 보이는 국가에서도 적어도 형식적·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 제도들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들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올바른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수단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국민들 모두가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은 경우 민주주의가 오히려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독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선심성 정책을 펴다가 경제를 파탄 낸 남미의 포퓰리즘,선거를 통해 독재자를 옹립한 히틀러 시대의 독일 등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역사를 퇴행시킨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