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경제자유,개방적 사고 억압하는 사상·체제가 발전 가로막아
[Cover Story] 4대 발명으로 앞섰던 옛 중국은 왜 유럽 열강에 먹혔을까
'종이,인쇄술,나침반,화약'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이다.

종이는 AD 2세기,나머지는 10~11세기에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4대 발명품은 중세 시기까지 탁월한 절대우위 품목들이었다.

실제로 중국은 경제력·군사력·문화수준 면에서 유사 이래 대부분 기간 최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근대에 들어와서 중국은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오랜 잠에 빠진 용에 비유됐다.

중세 유럽에 견줘 과학적·기술적 우위를 지니고도 정작 근대화에 뒤처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국가경제를 성장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지 옛 중국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

중국은 군사적으로는 허약했던 송(宋)나라 때가 기술과 문화로는 전성기였다.

영토는 거란의 요(遼),여진의 금(金)에 밀려 중원을 내주고 양쯔강 이남의 남송(南宋)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문화면에선 주자학의 주희와 소동파 등 당송(唐宋) 8대가가 활약하던 황금기였고,과학기술면에서도 활판인쇄술,나침반,화약에다 물레바퀴,물시계까지 모두 이 시기에 발명됐다.

4대 발명품 중 종이만 AD 105년 후한(後漢)시대에 발명된 것이다.

중국의 발명품들은 뒤늦게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다.

채륜이 완성한 최초의 제지법은 중국과 사라센제국 간의 탈라스강 전투(751년·현재 카즈흐스탄 일대)에서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이 패할 때 포로로 잡혀간 제지공들에 의해 비로소 전해졌다.

10세기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반도 유럽에는 13세기에야 전래된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도 그 덕이다.

중국에선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BC 300년께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이 서쪽으로 가지 않은 까닭은

중국은 인구·경제·군사면에서 아랍이나 유럽보다 우세했지만 탈라스강 전투 패배 이후 서쪽으로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한족이 아닌 칭기즈칸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이를 두고 주경철 서울대 교수는 중국을 '자기 내부로 갇혀버린 제국'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중화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명(明)나라 때 환관 정화(鄭和)의 대선단이 15세기 중반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일설에는 희망봉까지) 항해한 이후 내린 결론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하여 없는 것이 없고 이미 문화적으로도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다른 미개한 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 즉,서쪽 '오랑캐'들은 중화에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정화의 항해 이후 중국은 배를 전부 쪼개서 땔감으로 쓰고 백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海禁)시켰다.(주경철,'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중국인의 사고는 오로지 안으로 침잠한 반면 유럽 각국은 앞다퉈 5대양을 누볐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이,유럽인들은 대항해,식민지 건설,전쟁 등의 필요 때문에 항해술을 개발하고,전쟁과 통치에 필요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 성과물들은 산업혁명으로 집대성됐다.

19세기 들어 거대제국 중국은 유럽 열강들에게 분할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긴 역사의 마라톤에서 중반까지 선두를 달리던 중국이 갈수록 뒤처지게 된 것이다.

⊙선진화는 사상·체제의 종합 결과

미국 프린스턴대 윌리엄 보몰(Baumol) 교수는 송나라 시대 산업화의 주요 방해물로 기업가정신을 금지한 사회시스템을 꼽았다.

보몰 교수는 슘페터의 대를 이어 기업가정신이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이라고 강조해온 학자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유교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체계는 상공업을 저급한 활동으로 간주했고,황제는 백성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사업을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중국인이 부와 지위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시험이었다.

합격만 하면 관료로서 평생 직위를 보장받고,권력을 누리며 심지어 부패를 통해 부유해졌다.

그렇다고 중국에 상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인은 '동양의 유대인'이라 불릴 만큼 타고난 상인이다.

이런 모순에 대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에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 상인은 부자가 되면 자식은 사업 대신 과거시험을 보고 관료조직의 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했다.

상당수의 상인들이 재투자보다는 사업에서 번 돈으로 토지를 샀는데,그것이 훨씬 더 나은 신분을 부여해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부와 지위는 기술개발이나 상거래가 아니라 '관청의 인·허가'에서 나왔다.

이런 '큰 정부'식 사상과 체제에서 일반 국민들이 '경제하려는 의지'를 갖기 힘들다.

과학·기술적 우위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다.

옛 우리 조상들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술혁신과 기업가정신이 필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법적,사상적 체제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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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4대 발명으로 앞섰던 옛 중국은 왜 유럽 열강에 먹혔을까
우주선 먼저 쏘아올린 소련이 붕괴한 이유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1991년 소련의 몰락까지 70여년 동안 공산주의 실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인해 시장경제의 우월성이 역설적으로 입증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벤 버냉키 의장이 '버냉키·프랭크 경제학'에서 설명한 그 이유를 들어보자.

소련은 미국보다 우주선을 먼저 쏘아올렸고,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학문의 영재교육으로 과학·기술 면에선 결코 미국에 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련이 붕괴한 것은 서구에 비해 형편없는 생활 수준으로 인해 대중의 불만이 쌓인 점이 주된 이유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 성과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내재적 취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유재산권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소련 국민들은 더 많은 사적재산을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해 좀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행동할 유인이 거의 없었다.

미국,일본 기업의 소유주들은 기업의 수익에 의해 소득이 결정되므로 비용을 절감하고,부가가치가 높은 재화를 생산하게끔 강하게 동기부여가 돼 있다.

하지만 소련 국영기업 경영자들은 정부계획에 따라 정해진 목표만 채우면 되므로 굳이 더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 필요가 없이 수량만 채우면 됐다.

소득도 미리 정해져 있어 열심히 일할 이유도 없다.

또 다른 취약점은 자유로운 시장의 부재다.

계획경제 체제에선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생산할지를 정부 계획당국이 정한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재화에다 수많은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효용이 다 다르고,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무리 우수한 관료라도 수요·공급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가격 시스템 이상의 계획을 짜낼 수 없다.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노동자들은 일하는 척,정부는 배급하는 척'하는 체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