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해보겠다는 의지있는 나라가 자원이 많은 나라보다 성공 가능성 높아
[Cover Story] ‘경제 하려는 의지’가 경제성장의 원동력
무르익는 가을과 함께 국내 토종 아웃도어 브랜드 'K2'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단풍놀이 철을 맞아 전국의 산행 명소마다 좌판을 깔아 놓고 중국산 짝퉁을 파는 노점상들과의 전쟁 때문이다.

법원은 최근 'K2'라는 이름이 히말라야에 위치한 특정 봉우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상표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 바람에 'PRO K2''K2 살라만''K-2''K2 ACT' 등 K2라는 문자의 앞·뒤에 다른 단어를 이어붙인 중국산 유사상표 제품들이 범람하게 됐다.

유명 브랜드의 명성에 편승하려는 조잡한 유사상품을 쏟아내는 것으로 말하자면 지난 시절 한국의 모습도 지금의 중국 못지 않았다.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무고한 백광호(박노식 분)를 범인으로 몰아 고문을 가한 것을 사과하는 뜻에서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이 운동화 한 켤레를 들고 광호의 식당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두만은 운동화를 가리켜 "이게 나이키(nike)야 나이키"라고 강조하지만 실은 미국 나이키의 유명한 심벌마크에 한 획을 더 그려 넣어 절묘하게 모방한 '나이스(nice)' 운동화임이 결국 밝혀진다.

이 장면을 본 대다수 관객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 진품을 살 돈이 모자라 이렇게 국산 유사상표 제품으로 만족했던 추억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경제하려는 의지가 성공의 관건

한국은 과거 내다 팔 자원이 없고 농업 역시 자급자족에만 겨우 만족하는 수준이어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성장을 꾀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본과 기술,브랜드력 등이 모자라 제조업 육성도 쉽지 않았다.

경제 발전 수준이 낮아 '지식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고 정부의 단속도 느슨하던 시절이었기에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선진국 제품을 모방한 '짝퉁'을 만들어 싼값에 수출했다.

이제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밑거름으로 선진국 문턱에까지 올라왔다.

이탈리아 브랜드 '휠라(FILA)'를 모방한 '힐라(HILA)'를 팔던 한국이 이제는 휠라의 글로벌 판권을 넘겨 받아 세계 시장을 호령하게 됐다.

중국 기업들이 '애니콜' 휴대폰과 '마티즈' 승용차를 베끼는 것을 나무라는 입장으로 바뀐 것도 커다란 변화다.

'브랜드 강국'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가.

비록 '짝퉁 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긴 해도 2000년 이후 연평균 10% 이상의 고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산업에 투자되는 돈도 2003년 이후 연평균 25% 이상 증가했다.

그 결과 무역흑자가 7년 동안 7배 증가했고 1조달러를 넘어선 외환보유액은 단연 세계 1위다.

적극적인 고정자산 투자와 외자도입,그리고 수출 확대를 통한 고도성장이라는 한국의 경제 발전경험과 매우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짝퉁을 만들어 파는 건 물론 잘못이다.

오로지 그것에만 의존해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잘 살아보기 위해 '절대 안 되는 것' 빼고는 다 해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즉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기술이 없다고 앉아서 굶느니 남의 것을 베껴서라도 생산 활동에 나선 나라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는 결국 더 잘 산다는 얘기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다.

반대로 '경제하려는 의지'가 없는 나라는 결코 후진국의 멍에를 벗을 수 없다.

연중 4모작이 가능해 곡식이 남아 도는 방글라데시나 막대한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미얀마의 낙후된 현실은 이를 입증한다.

먹을 것과 자원이 풍부한 것이 사람들의 경제 의지를 약화시켜 결국 후진국에 머물게 한다는 '네덜란드병(Dutch disease)'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경제하려는 의지'가 움틀 수 있는 환경이 됐느냐 또 그것을 사회적으로 북돋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2차 대전 이후 부국과 빈국을 가른 분수령이 됐다.

⊙민간의 활력이 원동력

'경제하려는 의지'라는 개념은 197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서 루이스가 처음 들고 나왔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던 루이스는 경제 문제를 경제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정치나 철학 심리학 등의 다른 학문의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했다.

그는 인도가 공업진흥정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경제 개발의 관건은 투입 자원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가 경제 개발의 추진 주체가 되는 공산국가들의 이른바 계획경제가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 경제의 가장 핵심적 요소인 국민들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꺾어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의 기준으로도 한국은 가장 모범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1960년대 말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국민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때부터 철저하게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를 바탕에 깔았다.

비록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이라고 할지라도 정부는 도로·철도·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세제 혜택 등 유인정책(incentives)을 쓰는 데 그쳤고 사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민간기업에 맡긴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다.

그래서 기업인들은 경제개발계획에 나와 있는 정보를 토대로 자기 책임하에 사업을 했고,그 과실도 스스로 따먹었다.

그랬기에 한국의 기업인과 근로자들은 앞서 있는 선진국 기업을 추격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와 도전을 시도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이 삼성 현대 LG 포스코 등 글로벌 기업을 여럿 키워내고 살림을 불려 먹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된 이유다.

물론 모방을 통해 유사제품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짝퉁'이 범람하는 것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지식재산에 대한 보호 없이는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어려울 뿐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 자본'이 무너져 경제 성장으로 맺는 열매보다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하려는 의지'까지 퇴색시킨다면 우리 경제에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는 "최근 한국이 정책적으로 자유주의보다 평등주의에 치우치면서 각 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점차 약화되고 있다"며 "민간의 활력보다 비대해진 공공부문의 역할에 의존하는 경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