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혈족주의에 침을 뱉어라

[Cover Story] 단일민족국가 vs 다민족국가
세계에는 3000여개의 민족이 있지만 국가는 200개 남짓(세계은행 통계 229개)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단일민족국가'라고 배우며 하나의 민족의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오히려 극히 이례적이다.

혈통상 100% 순수한 단일민족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2~3개 민족에서 많게는 수십개 민족이 모여사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스위스처럼 다양한 민족들의 특성이 합쳐져 시너지를 이루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족·인종·종교·문화적 갈등(르완다,체첸,보스니아 등)을 안고 살기도 한다.

세계사 속에,그리고 현존하는 국가들을 통해 민족,민족주의와 국가 개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인종·언어·문화적 동질성

민족,국가,국민을 뜻하는 영어 단어 'nation'은 라틴어 'nasci'(출생을 의미)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파생된 'nationem'은 혈통(blood),인종(race)을 뜻하며 중세에는 고향이란 의미였다.

고향이란 출생지 개념이 확대돼 국가는 혈연으로 연결된 집단이란 개념을 갖게 됐다.

유럽에서는 국가를 'state'(독어로 Reich),국민은 'nation'(Volk)으로 구분하지만 미국에선 혼동해서 쓴다.

이는 유럽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국가(nation state) 단계를 거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은 "혈연에 의해 연결된 사람들이 동일한 역사경험을 통해 공동의 역사인식을 갖고 언어를 통해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인종적·언어적·문화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

중세까지만 해도 민족이란 개념은 거의 없었다.

고대 제국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통해 속국을 거느리는 다민족 체제였고,중세에는 속세의 국가들보다 종교적 동질성이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대두한 유럽 시민사회에선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룬다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도시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약화된 친족개념,문화·종교·전통의식을 국가 차원에서 재통합한 것이 민족주의인 셈이다.

경제적 토대를 갖춘 영국,프랑스는 강력한 국민국가 체제를 이뤄 민족주의의 시초를 이뤘다.

'1 민족 1 국가'라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오랜 분열상태였던 이탈리아(1870년)와 독일(1871년)도 민족국가로 통일을 이룬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근대국가들은 '국가=국민=민족주의'의 등식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히틀러에 의해 극단으로 치달은 독일의 게르만 민족주의는 인종적 우생학으로 변모해 세계사에 씻지못할 비극을 낳았다.

이탈리아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로 귀착된 것을 보면 '과도한 민족주의'는 전체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유럽 근대국가들이 팽창적 민족주의,즉 제국주의로 변모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등으로 전파된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저항적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특히 1차 세계대전 후 제기된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주의를 통한 독립저항운동에 불을 붙였다.

20세기 후반에는 민족주의가 종속이론,해방신학 등과 결합하면서 서구세계와 대립양상을 보였다.

◆脫민족·超민족주의 시대

이 같은 민족주의의 기세도 1980년대 말 옛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급속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교통·통신·기술의 발달로 더이상 '자급자족형' 민족주의 국가는 설 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와 경제발전이 화두로 떠올라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국가들도 유연한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또한 비교적 단일민족 체제에 가까웠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선진국들도 인도 알제리 터키 등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다민족 체제로 전환했다.

다만 서구 중심의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화되고 있지만 이는 종교적인 구심점에 의한 것이지 과거 아랍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비록 보스니아 사태,르완다 내전 등 종교·인종 간 국지적인 분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20세기 말 이후엔 다민족 다문화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입각해 타민족에 대한 관용(똘레랑스)과 이해가 확대되는 추세다.

이는 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속을 다지는 각종 국가 간 공동체로 구체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연합(EU),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등이다.

유럽은 로마제국 이래 1000년 이상 지속됐던 국가·민족 간 전쟁상태가 EU 출범으로 사실상 종식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국가 대 국가 간의 민족 갈등은 상당부분 희석되고 있지만 한 국가 내에서의 다수민족 대 소수민족 간 갈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미국의 히스패닉,터키 이라크 등지의 쿠르드족,스페인의 바스크족 등이 그 사례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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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중국인…인종공동체인가, 문화공동체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민족을 꼽으라면 단연 유대인을 꼽는다.

또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민족은 13억명에 달하는 중국인(한족)이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중국인은 한국인,일본인처럼 하나의 민족인가?

유대인은 2600여년간 고난의 유랑생활을 겪어오면서 유대 공동체를 유지·전승하기 위해 부계(父係) 전통을 버리고 유대인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확립했다.

즉 ①어머니가 유대인이면서 ②토라(Torah,유대교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 출생 직후 할례를 받고 ③유대교 율법을 따르는 사람 등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피부색,얼굴 등 유전적 특징을 따지지 않고 모두 유대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계 백인 유대인뿐 아니라 아프리카계 흑인 유대인도 있고,중동의 다른 유목민족 중에도 스스로 유대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중국 인도 등 동양계 남자와 결혼한 수많은 유대인 여성의 자녀들도 유대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유대인으로 인정받고 유대사회의 정체성을 이어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학살한 600만명의 유대인 가운데 상당수가 혈통상의 유대인이 아닌 동유럽 등지의 '문화적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중국은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한족은 대대로 중원에서 살았지만 하나의 민족으로 보기엔 생물학적 동질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중국 학자들이 양쯔강 이남과 이북의 한족을 대상으로 유전자(DNA)를 분석한 결과 서로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초한지'에 등장하는 초나라와 한나라는 실제 생물학적으로 다른 민족으로 묘사됐다.

이민족인 유목민들이 한족에 동화돼 중국 북부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양쯔강 이남에 거주하는 한족은 생물학적으로 양쯔강 이북 한족보다 태국,베트남인들과 더 유사성이 컸다는 분석 결과도 제시됐다.

따라서 '중국인'은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중국의 문화전통을 지키는 사람들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대인과 한족은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