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모두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들도 게임 이론 측면에서 흥미로운 전략적 문제를 보여준다. 오늘날 경쟁 기업과 시시각각 전략 싸움을 벌여야 하는 기업이나,소용돌이 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정부도 게임 이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오늘도 전 세계의 지도자,CEO들은 고민한다. 물러설 것인가,밀어붙일 것인가?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나의 전략에 상대는 어떻게 반응할까? 게임 이론의 돋보기를 들고 세상사를 비춰 보자.

◆코르테즈와 명품 브랜드의 배수진

16세기 스페인의 해군 장교 코르테즈는 불과 11척의 배와 5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인구 50만명에 달하는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정상적으론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코르테즈는 병사들과 아즈텍인이 보는 앞에서 배에 구멍을 뚫어 모두 좌초시켰다. 이 같은 배수진은 병사와 아즈텍인들에게 자신의 결전 의지를 각인시켰고,결국 아즈텍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예로 루이비통과 샤넬,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는 시판된 지 2~3년이 지난 재고품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이런 장면을 기자와 세무 공무원에게 공개한다. 이는 재고품이 아무리 비싸도 절대 싸게는 안 판다는 공약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소비자는 명품의 희소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처럼 상대방의 전략 선택을 제한하는 것을 게임 이론의 용어로 '신빙성 있는 위협'이라고 한다.

◆북한은 게임 이론의 명수(?)

미국을 상대로 대담한 흥정을 벌여 온 북한 정권은 탁월한 게임 이론가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북한의 목표는 변함 없는 체제 유지와 남한의 공산화인데,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워낙 벌어지다 보니 정상적인 방법으론 어려워졌다.

그래서 취한 전략이 핵을 빌미로 미국을 10여년째 협상 테이블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남한에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감성적 전략을 병행한다. 핵은 협상력을 높이는 수단이므로 북한으로선 경천동지할 지원과 약속을 얻어내기 전까진 포기할 이유가 없다. 북한은 여건이 어려울수록 초강수를 두는 '벼랑끝 전술'로 최상의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북한을 인질범으로 볼 수도 있다. 인질 이론으로 보자면 한국은 북한의 핵 인질로 잡혀 있고 북한은 한국을 통해 협박 전술을 극대화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줄서기-진화 게임이론

진화 게임 이론에 의하면 여러 번 반복된 학습 과정과 경험을 통해 경기자들은 다수의 선택을 흉내 내는 군중 행동(herd behavior)에 가담한다. 생존경쟁 게임에서 자연 선택의 과정을 밟아 장기적으로 적자생존의 원리가 성립한다는 찰스 다윈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치인들의 줄서기다. 정치인들은 보스의 인품이나 능력보다 '될 만한 가능성'을 더 중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될 만한 보스에게 줄을 서게 되면 그 보스는 더욱 강한 권력을 갖게 돼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는 수많은 식당 중에서 이른바 원조 식당에 손님들이 몰리는 심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장충동 족발집,오장동 냉면집처럼 식당들이 밀집한 지역에선 너 나 없이 '원조,진짜 원조,진짜진짜 원조'라는 간판 경쟁이 치열하다.

◆반복게임은 신용을 만든다

인간 행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한번 보고 말 사이'와 '두고두고 봐야 할 사이'에 대한 대응이 판이하다는 점이다. 기차역 앞 식당에 가면 수십 가지 메뉴를 고를 수 있지만 종업원의 친절이나 음식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한번 스쳐 지나갈 손님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민을 상대로 한 음식점은 맛도 맛이지만 우선 친절하다. 자주 찾아오게끔 단골로 만드는 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상거래에서 신용은 거래 관계가 얼마나 반복적·지속적이냐에 달려 있다. 단 한 번뿐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선 배신이 우월 전략이 되지만 반복적인 게임이라면 협력이 더 유리한 결과를 만든다. 애덤 스미스는 "규모가 크고 상거래 빈도가 잦은 상인일수록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정직하게 행동할 인센티브가 크다"고 지적했다.

◆'디팩토 표준'도 내시 균형

디팩토 표준(defacto standard)이란 공식적으로 인증 기관에 의해 공인된 표준은 아니지만 시장에서 형성된 사실상의 표준을 의미한다. 예컨대 비디오 규격의 VHS 방식,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MS오피스,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경우다. 이런 디팩토 표준도 내시 균형의 상황이다. 디팩토 표준이 시장을 장악함에 따라 사용자들은 다른 표준이나 규격을 사용할 경우 이익을 볼 수 없다. 예컨대 소니의 베타 방식 비디오는 VHS 방식과 호환해 볼 수 없고,윈도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에선 구동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가 많다. 이는 네트워크 효과에 의해 사용자들의 전략 선택이 제한된 결과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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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게임이론의 교과서

[Cover Story] 게임의 법칙을 즐겨라
영화의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관객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데 게임적 상황은 더없이 유용하다. 그래서 게임이론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해 보면 논술에 활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예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각색한 TV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79)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선 반복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엿볼 수 있다. 실제 1차 대전 당시 참호를 파고 대치한 영국군과 독일군은 전선이 교착 상태가 되자 자발적으로 공격을 자제했다. 서로 정조준했을 때의 피해를 잘 알기에 일부러 오조준해 피해를 줄이는 균형이 이뤄진 것이다. 또 판문점 JSA에서도 매일 대치하던 남북한 병사들이 서로 초소를 오가며 우정을 키운다. 이런 균형은 제3자(공격 명령,북한군 상사)가 개입하기 전까진 유지된다.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61)에서는 마주 보고 자동차를 달리다가 먼저 핸들을 돌리는 쪽이 지는 '치킨 게임(chicken game·겁쟁이 게임)'이 등장한다. 이기려면 핸들을 고수해야 하지만,상대도 같은 전략이면 충돌 사고로 죽는다. 따라서 게임 전에 자신은 절대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는 자신의 전략(운전대,액셀러레이터 고정 등)을 상대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를 게임 이론에선 '신빙성 있는 위협'이라고 한다.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이유 없는 반항'(1955)에서도 낭떠러지 쪽으로 차를 몰다가 먼저 멈추는 쪽이 겁쟁이로 낙인 찍히는 치킨 게임이 나온다.

멜 깁슨 주연의 '랜섬'(1996)도 게임 이론 측면에서 흥미롭다. 아들의 몸값(ransom)으로 200만달러를 요구한 범인들에게 아버지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몸값을 400만달러로 높이고,이를 범인들에 대한 현상금으로 바꾼다고 선언한다. 이는 신빙성 있는 위협으로 작용해 범인 중 한 명이 몸값 대신 현상금을 받기 위해 동료를 신고하는 다른 선택을 유발한다.

'페이스 오프'(1997) 등 우위썬 감독의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누구든 먼저 방아쇠를 당기면 이길 수 있지만 영화에선 늘 그 상태의 균형을 유지한다. 강대국들의 핵 개발이나 군비 경쟁도 바로 이런 상황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