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이미지의 폭주 시대이다.

디지털 기술혁명이 더해지면서 이미지의 무한 복제도 가능해졌다.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 싸이월드와 디지털 카메라·캠코더 등의 열풍으로 인해 창작의 주체도 특정 소수(예술가)에서 불특정 다수(대중)로 확장되고 있다.

이미지의 범람은 교실에서부터 기업에 이르기까지 소통 방식을 급속히 바꿔놓고 있다.

이로 인해 문자 텍스트가 소멸될 것이란 성급한 전망까지 나온다.

과연 그럴까?

◆ 이미지 폭주·무한복제 시대

사진과 동영상으로 대표되는 이미지 세계는 급속도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1839년 프랑스 다게르의 사진기 발명 이래 회화에서의 사실주의는 사실상 종막을 고했다.

그림보다 더 정확하게 사물을 담아내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진화를 거듭한 카메라는 디지털 기술과 접목하면서 다수의 예술 소비자를 생산자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있다.

최근 UCC 열풍은 누구에게나 손에 디카, 캠코더, 카메라폰이 손에 쥐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표현 면에서도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창공, 이면, 미세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도 제작을 위해 시작된 항공 사진이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주는 사진 예술이 됐고, X레이와 현미경까지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물과의 거리(원근)도 카메라에선 무의미해졌다.

이처럼 새로운 수단의 등장은 예술은 물론 소통 자체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 문자와 이미지의 전쟁

최근 들어 이미지가 텍스트를 압도하는 듯이 보인다.

이미지는 즉각적·직관적으로 감정과 현상을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현대의 소통 문화는 문자 텍스트에서 이미지 텍스트로의 권력 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치 문자와 이미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전쟁으로도 읽힌다.

교실에서도 아날로그식 칠판의 자리를 영상 이미지(파워포인트)가 대체해 간다.

하지만 보고 바로 느끼는 이미지가, 읽고 깨닫는 문자 텍스트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지의 범람은 현대인에게 '참을 수 없는 사유의 경박함'을 안겨줬고 포르노그라피의 범용화라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성급한 일부 전망가들은 문자 텍스트의 소멸을 예언하지만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이길 거부하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종이로 된 문자 텍스트가 가져다 주는 숙고, 사려 깊음 등의 장점을 이미지가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미지의 배반

[Cover Story] 이미지의 폭주 문자와의 전쟁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는 일찍이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미지의 배반'이란 제목을 붙였다.

기표(표기되는 것)와 기의(의미하는 것)의 엇박자를 암시한 것이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착각을 안겨줄 위험을 내포하며, 수용자의 의식에 의해 보이는 것이 실체가 다르게 망막에 맺힐 수도 있다.

예컨대 황우석 교수 파동이 터지기 전까지 사진에서 보여지는 황 교수의 이미지는 '희망, 열정, 승리' 같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한 보험회사 광고판의 'Pride of Korea'란 문구 앞에서 손을 흔들며 웃는 황 교수의 사진까지 신문에 게재됐다.

하지만 황 교수 사태가 터지자 그의 사진은 '조작, 거짓, 배반'의 이미지로 추락한다.

우리가 본 이미지에서의 표상은 변하지 않았는데 본질은 180도 달라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보는 것이 전부이고 봤기에 옳다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고,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한다.

사유하지 않는 이미지는 늘 착시(錯視)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도움말 주신 분=김기정 선생님(울산미래정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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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의 예술…"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Cover Story] 이미지의 폭주 문자와의 전쟁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물질의 표면만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 미술 세계는 태양광 같은 가시 광선이 물질 표면에 부딪쳐 발산되면서 사람 눈에 보여지는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면서 물질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새로운 빛의 세계가 열렸다.

의학,과학의 영역에서 주로 이용되던 X-선은 이제 미술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정태섭 연세대 의대 교수(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는 X-선 전문의이면서 X-선 예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미술계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정 교수는 포도주 잔을 잡은 손(작품명 '축배'),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영혼') 등을 X-선 투과영상 표현 기법을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은행잎, 장미, 청포도 등도 그의 X-선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가 봐 왔던 가시 광선에 의한 형상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입 속의 검은 잎'. 1989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동명 시를 X-선 사진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시에서 얻은 관념을 상상을 넘어 영상으로 표현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정 교수는 "우리는 가시 광선에 의해 나타나는 사물의 색감과 질감에 익숙해 있지만 X-선을 이용한 투사 영상에는 현실을 보면서도 일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인 새로운 구조와 감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