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우리에게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한국인의 일상 속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는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universal value)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한국 특유의 종족주의가 보편적 가치라는 인류 공통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만약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우리의 이 같은 태도는 시급히 버려야 한다.

◆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가

보편적 가치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공통된 가치나 기준을 말한다.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도둑질은 나쁘다' 등과 같은 보편적 윤리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들이다.

쉽게 말하면 보편적 가치는 많은 합리적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맞아!" 하고 공감하는 것으로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말한다.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존중 등이 보편적인 가치로 꼽히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우리나라 헌법 규정 중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제1조의 내용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조문화한 것이다.

국민의 존엄과 가치,행복추구권 등을 정의한 헌법 제10조도 보편적 가치를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일제 시대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이는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이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정면으로 위배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역시 이 문제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비춰볼 때 용인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데 국제사회가 동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보편적 가치와 상대주의

보편적 가치를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개념이 상대주의다.

상대주의의 기본 개념은 어떤 절대적인 진리나 규범의 절대적인 타당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불변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규범이나 규칙도 달라져야 한다는 논리다.

이렇게 보면 상대주의는 얼핏 보편적 가치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라고 말을 할 때에도 그 안에는 여러가지 스펙트럼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상대주의는 다른 보편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일부 급진적 혁명주의자나 종교근본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이나 종교의 목표인 특수한 가치가 인간의 생명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념이라는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생명이라는 소위 보편적 가치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알카에다에 의한 9·11 테러나 각종 자폭 테러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상대주의라고 해도 보편적인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종교와 규범을 추구하는 형태도 있다.

다른 종교의 이념과 신념을 따르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은 이런 유형의 상대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상대주의는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편적 가치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보편적 가치 역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절대 불변일 수는 없다는 면에서 그 내면에 어느 정도 상대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말할 때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일정한 규범과 가치를 말하지만 여기에는 다양성을 전제로 한 다원주의의 입장도 포함된다.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대적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지역마다 국가마다 다르지만 보편적 가치에 어긋날 때는 하위문화 혹은 저급 문화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들어 이슬람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어긋날 것이 없지만 특정 이슬람 지역의 여성 할례 같은 것은 어성 인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 민족주의 종족주의와 보편적 가치

민족주의는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지 않은 범위에서는 특정 국가와 민족의 단결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것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 종족주의의 색채를 띠게 될 경우 문제는 심각해 진다.

독일과 일본의 잘못된 민족주의가 선민의식으로 연결되면서 타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이어진 것은 보편적 이성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편협한 민족주의가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잉된 민족주의 내지 종족주의는 결국 전체주의로 이어지면서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파괴하고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십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이 갖고 있는 종족주의적 민족주의 역시 경계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민족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집착은 최근 발생한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 개인의 범죄에 대해 범인이 단지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통령과 주미대사까지 나서 온 나라가 유감과 사죄의 뜻을 밝히고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유족들의 슬픔보다는 한국인에 대한 보복 범죄부터 걱정하는 태도가 그런 실례다.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런 모습은 그대로 드러난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북한을 판단하기보다는 민족이라는 감상적인 잣대를 앞세우기 일쑤다.

한국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애써 외면해 온 것이나 어떤 정치체제든 통일만 되면 된다는 식의 통일지상주의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주체사상적 통일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지옥을 만들어 낼 뿐이다.

흔히 글로벌 스탠더드를 말하지만 정작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그리고 올림픽과 월드컵까지 치러낸 한국인의 의식은 여전히 편협한 종족주의의 틀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말 우리 정부가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비록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취임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나마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비춰볼 때 진일보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사건을 계기로 종족주의를 초월한,좀더 보편적 가치에 접근하는 방향으로의 국민 의식 전환을 기대해 본다.

보편적 가치는 충분히 합리적인 개인의 숙고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정신의 성숙이 전제되고 있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