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중국 베이징 방문길에 중국과학원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그는 처음 베이징을 방문했던 1971년 9월을 뚜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이어 "중국이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당연한 얘기다.

당시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었다.

세계 경제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고,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서방 국가와 전방위 개방 체제를 갖추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71년 중국 방문으로 '죽(竹)의 장막'을 열었던 키신저 전 장관은 지금 그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의 흐름을 추적해 보자.

1949년 10월1일.공산혁명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누각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선포한다.

건국의 기쁨도 잠시 마오는 혹독한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경제가 문제였다.

수십 년에 걸친 내전(공산당과 국민당의 싸움)과 항일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지경에 몰리고 있었다.

마오는 경제 부흥에 착수했다.

당시의 우방이었던 옛 소련으로부터 자금과 기술을 들여와 경제 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경제를 추스르기도 전에 발발한 한국 전쟁(1950년)에 참전,또다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뒤이어 발생한 중·소 분쟁으로 중국 경제는 다시 고립된다.

소련을 버리기로 한 마오는 자력갱생(自力更生) 노선을 채택했고,1958년 대약진(大躍進)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대약진운동 시기,경제 여건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업에는 보다 많은 생산 목표가 하달됐고,주민들은 가정에 있는 쇠붙이 조각을 철강 공장에 바쳐야 했다.

'15년 안에 철강 생산에서 영국을 따라잡자'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서다.

급진적인 정책으로 경제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50년대 말 불어닥친 가뭄으로 약 3000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어야 했다.

대약진 운동은 경제에 부담만 안겨준 채 실패로 끝났다.

마오는 대약진 운동의 책임을 지고 최고 권력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야 했다.

그는 복권을 꿈꿨고,그 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문화예술 분야 개혁으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마오가 의도한 정치적 색채가 가미되면서 극단적 계급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학생이 선생님을 쫓아내고,종업원이 공장장을 몰아내고,간호원이 의사를 비판하는 등의 투쟁이 일상화됐다.

경제는 올스톱 상태에 빠졌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중국 경제를 또다시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이다.

10년간 문화대혁명에 시달리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1976년 9월9일 '복음'이 전해진다.

마오가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중국은 마오의 시대를 끝내고 덩샤오핑(鄧小平)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마오 사후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덩이 1978년 말 베이징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개혁·개방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은 마오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그는 이념 투쟁,계급 투쟁 등을 통해 역사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마오의 이론을 버렸다.

대신 '국민들이 잘살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것'이라는 현실적인 노선을 택했다.

'흰 고양이든,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은 덩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덩은 "앞으로 최소한 100년 동안 경제만을 생각하라"고 일갈했다.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이념의 틀을 벗어나라고 재촉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라면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불평등,불균형 발전도 용인됐다.

'먼저 부자가 되어도 좋다(先富起來)!'는 것이다.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윗목도 자연스레 따뜻해질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었다.

덩은 1994년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도 시장 경제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노선은 그렇게 등장했다.

중국인들은 이 같은 흐름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돈을 쫓아 앞으로 달렸고,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외국 기업들은 풍부한 노동력을 노리고 중국으로 달려들었고,경제에는 활기가 돋았다.

그러나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문제점이 잉태되고 있었다.

전력 원유 등 에너지 부족,경제 성장과 함께 날로 확대되고 있는 도농 빈부격차,부정부패 등이 중국 경제를 옥죄고 있었다.

2002년 10월 등장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체제는 이 같은 문제점에 주목,'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이라는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경제 발전도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따져가면서 추진해야 한다는 게 이 정책의 핵심이다.

후 주석은 이 노선에 따라 빈부 격차,부정부패,에너지 부족 등을 해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덩샤오핑 식의 무리한 성장 정책에서 탈피,성장과 복지를 강조한 발전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성장뿐만 아니라 복지도 챙기겠다고 나선 후진타오 체제하의 중국이 어떻게 발전할지 주시하고 있다.

한우덕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woody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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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읽기

▷고교 『경제』(두산동아) 37쪽="러시아와 중국은 아직도 개인의 선택보다 정부의 계획이 우선하고 있으므로 계획경제 체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선생님 의견

중국 경제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지만 아직 교과서에서 이에 대한 설명은 미미.

*도움말 주신 분=문명희 선생님(광주 상무고) 양윤덕 선생님(경기 덕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