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개방때마다 과잉지원

정부의존도만 키웠다

우리 사회에는 비판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는 성역(聖域)이 존재해왔다.

바로 농업이 그렇다.

농업을 개방하자고 하면 식량주권을 포기하고 농민을 사지(死地)로 모는 매국노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 금기를 처음 깬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농림부의 신농정 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농업도 시장 밖에다 놓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농업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시장원리에 따라 경쟁력 있게 키우자는 이야기다.

예상대로 이 발언은 농업계 등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농업 문제를 시위가 아닌 토론의 장(場)으로 끌어들인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개방 때마다 되풀이되는 농업붕괴론

우루과이라운드(UR) 때도 그랬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때도 그랬고, 한·미 FTA에서도 그렇다.

개방하면 한국 농업은 다 죽는다고. '개방=농업 붕괴'라는 논리 비약적인 등식이 국민들 뇌리에 새겨져 있고, 협상장에선 종종 할복하고 분신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농업을 개방한다고 해서 개방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무조건 망하지는 않는다.

철저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키운 경우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어차피 양적으론 미국 등 농업 대국과 경쟁할 수 없다.

농업의 품질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는 요인은 비효율과 정부의 과잉 지원에서 찾을 수 있다.

개방에 따른 피해가 부풀려지면서 정부 보조금이 많아졌고 결국 농업할 의지 역시 낮아졌다.

직접 피해를 입는 농가에는 소득을 보전해 줘야 하지만, 정부의 농촌 투자자금이 '눈먼 돈'으로 여겨지고, 정작 필요한 농민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과잉 지원으론 농업경쟁력 못 살린다

1993년 UR 타결 이후 정부는 농업 경쟁력 강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42조원을, 김대중 정부에서는 45조원을 각각 투입했다.

참여정부 들어 투입한 돈까지 합치면 UR 이래 130조원을 농촌 지원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나아진 것도, 달라진 것도 별로 없다.

정부나 농민이나 농업을 보는 근본인식이 변하지 않은 채 돈만 쏟아부은 결과 천문학적인 농가 부채를 남긴 채 농업 구조개선이란 명분은 흐지부지됐다.

농업 총생산(GDP)의 42%가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기반 위에서 나올 만큼 정부 의존도만 키웠다.

김영삼 정부에선 과잉 지원자금으로 농민들이 너도나도 한우를 키우겠다고 나선 끝에 1998년 소값 폭락 파동을 겪었다.

김대중 정부 땐 넘치는 지원금으로 마을마다 도서관,문화회관을 지어줬지만 몇 해 못가 건물은 창고로 전락했다.

참여정부는 한·칠레 FTA를 계기로 2004년부터 10년간 119조원을 농업발전에 투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다면 농업대책은 이전 정부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기업농 출현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농업, 특히 쌀 농사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기업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기업 수준의 전업농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무엇보다 유교적인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 사상이 뿌리깊어 농업문제에 대해 온정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가구당 경작면적이 3500평(약 1ha)에 불과해 구조적으로 영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개방 고비 때마다 농업 지원정책이 농업기업이 아닌 농가 위주로 편성돼 영세 농업을 오히려 고착화시켰다.

또 그동안 농지 가격이 너무 오른 것도 치명적이다.

대규모 농작을 위해선 우선 땅부터 확보해야 하지만 다락 같은 농지 가격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각종 국토 개발계획이 쏟아지면서 논밭의 땅값 상승률이 주거용이나 상업용 토지가격 상승률을 훨씬 웃돈다.

최근 2년간 논밭의 가격 상승률은 연간 6~9%대에 달해 주거용·상업용 토지 상승률(4~5%대)을 훨씬 웃돌았다.

◆두바이 크기의 새만금 땅 왜 놀리나

FTA로 농업 비중은 줄어들 텐데 8560만평에 달하는 새만금 간척지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을 빚고 있다.

새만금은 여의도 면적의 100배에 달하고,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규모가 비슷하다.

정부는 지난 3일 국무회의에서 새만금 땅의 71.6%를 농업용지로 개발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에 대해 전라북도는 중국과 인접한 새만금의 지리적 특성과,이 만한 규모의 토지를 새로 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대부분을 농업용지로 묶어두는 것은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농업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은 이렇게 매번 꼬이고 있다.

국가 경쟁력을 위한 종합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데도 늘상 농업이 걸린다.

한·미 FTA가 한국의 농업 경쟁력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인지 지켜보자.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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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중에 농업후진국 없다 … 우리도 활로 있어

선진국 가운데 농업 후진국을 찾기 힘들다.

꾸준히 품종을 개량하고 경쟁력을 키운 덴마크의 낙농, 네덜란드의 화훼 등은 독보적이다.

뉴질랜드는 1980년대만 해도 정부 지원금으로 농업을 유지했지만 세계 처음으로 농업 보조금을 없애고 양모, 키위 등 비교우위 분야를 집중 육성해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췄다.

심지어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일본도 화우(和牛) 품종을 개선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급 쇠고기로 만들었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모든 농산물을 다 생산하고 자급자족하진 않는다.

필요하면 사다 먹는다.

우리나라라고 못할 것이 없다.

이미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농산물이나 식품이 꽤 있다.

한국산 배는 지난해 28개국에 3665만달러어치가 나갔고, 심지어 미국인들 사이에선 추수감사절 최고의 선물로 자리매김했을 정도다.

10년 전 선진국 농업기술을 배워 재배를 시작한 파프리카는 일본 시장에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지난해 4593만달러 등 3년간 1억6391만달러어치가 수출됐다.

이는 같은 기간 한국 영화 수출액과 맞먹는 금액이다.

방울토마토, 백합 등도 일본시장에서 부동의 1위다.

농림부 관계자는 "농업 대국인 미국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농식품은 친환경 농산물, 건강식품 등인데 고부가 농식품을 생산해 수출하는 것이 농업 개방 시대에 최선의 대책"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치, 된장은 건강식품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시장이 개방된다고 우리 농업이 앉아서 다 죽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활로가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