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길 포기하고 창업 '벤처 1세대'

"이공계 후배들 뭔가 저질러 봐라"

'벤처(venture)'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첫머리에 '모험'이라고 해석돼 있다.

흔히 기업인들의 삶을 모험가에 빗대곤 한다.

'흥'(興)과 '망'(亡)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그들을 가리켜 "모험 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예 '모험'이라는 말을 앞에 붙인 벤처기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변대규 휴맥스 사장(47)은 우리나라 벤처 1세대이고,그 중에서도 '맏형'으로 꼽힌다.
[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7) 변대규 휴맥스 사장


그는 벤처기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1980년대 후반 자본금 5000만원으로 휴맥스를 설립,오늘날 매출 6600억원의 국내 디지털 셋톱박스 1위 업체로 키워냈다.

그는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 출신이다.

당시 서울대 공대 박사학위는 교수직에 오르는 '티켓'과도 같았다.

그러나 대학원 1학년 때 일찌감치 교수의 길을 포기했다.

"제가 일단 뭘 하면 잘해야 한다는 욕심이 있어요.

근데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뛰어난 교수가 될 재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학도 잘 못하고….그래서 포기했죠." 박사 학위 수여식을 코앞에 둔 1989년 초,그는 대학원생 친구들과 학교 근처 포장마차에 모여 서로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장난처럼 의견을 모은 것이 바로 창업이었다.

"평소 지도교수님께서 공대생은 논문 작성보다는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우리 연구실 친구들이 그 지도교수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사업계획이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젊은 혈기 하나 믿고 창업을 결정했죠."

당시 그들에게 없던 것은 사업계획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사업자금이 문제였다.

은행에 담보로 내세울 집 한 채 갖고 있지 못한 상태로,변 사장은 다짜고짜 기술신용보증기금을 찾아갔다.

"기술신용보증기금에 5000만원짜리 보증서를 신청했더니 창구 직원이 대뜸 집 등기부등본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하숙생인데요'라고 했더니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하숙생이 보증을 받으러 온 것은 처음 본다'고 말하더군요.

그것도 모자라 옆의 직원한테 이야기하며 자기네들끼리 킬킬거리며 웃더군요.

어쨌든 결국 보증서는 받았어요.

박사 학위를 보고 그랬는지."

사업 초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처음 5년 동안 해마다 1~2개 사업 아이템을 개발하다 접었다.

변 사장은 "시장이 필요한 것은 놔두고 휴맥스 내부 구성원들이 관심있는 것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처음 성공한 것이 가요반주기였다.

그 과정도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컴퓨터용 영상처리 보드를 만들었는데 출시 후 광고에 제품의 여러 용도 가운데 마지막에 '영상 위에 자막을 올릴 수 있다'는 문구를 넣었어요.

기술자 입장에서는 이 기능이 별로 안 중요하다고 여겨 마지막에 넣었던 것이죠.그런데 고객들의 문의전화가 이 문구에 집중된 거예요.

'이것이 시장이 원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예 노래방 영상에 자막이 나오는 가요반주기를 개발하기로 했죠."

휴맥스는 가요반주기 시장 1위에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변 사장은 이 '잘 나가던' 사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디지털 셋톱박스 사업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는 디지털 가전사업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해 디지털 셋톱박스 개발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디지털 셋톱박스 사업을 하면서 가요반주기 사업도 함께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이 들더군요.

그래서 포기한 거예요.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극단적인 결정인데 당시에는 그만큼 때가 묻지 않았던 거죠."

처음에는 쉽게 성공하는 듯했다.

휴맥스는 1996년 처음 유럽 수출에 성공,3개월 만에 수출액 3000만달러를 달성했다.

'대박'에 가까운 실적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절반이 반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휴맥스 직원들은 1년 내내 고장난 제품을 고치러 돌아다니는 데 시간을 몽땅 소비해야 했다.

그 사이 제품 판매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다.

"벤처기업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들은 자본은 없어도 기술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거죠.저희도 그랬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기술력도 모자랐던 거죠.이것 역시 교과서적으로 실패한 예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디지털 셋톱박스가 수신이 안 되니 누군들 좋아했겠습니까."

변 사장은 1997년 영국 공장 근처 숙소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 혼자 회사 상황을 점검해봤다.

그 결과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금은 없고 주가는 폭락하고 직원들 사기는 죽어 있는 데다 매출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궁여지책으로 자신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의 월급을 줄였다.

그 와중에 주요 거래처였던 한 국내 회사마저 부도가 났다.

당시 휴맥스 재무 담당 이사를 맡았던 사람은 변 사장에게 "끝인데요.

사업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변 사장은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반품이 들어온 제품들을 수리하면서 단점을 보완한 신제품을 개발,1997년 말 내놨다.

이 제품은 예상 밖의 히트를 기록했다.

제품 판매로 현금이 들어오면서 회사는 점차 정상을 찾았다.

"신제품이 몇 달만 늦게 나왔어도 망했을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100개,200개 주문해 갔던 유럽 유통업체들이 제품 품질에 만족하고 재주문을 해왔죠.1999년부터는 새로운 기능을 갖춘 제품을 가장 먼저 내놓는 기업으로 인식받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7) 변대규 휴맥스 사장
휴맥스는 이후 유럽뿐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동 시장에 뛰어들면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중동 시장에서는 점유율 1위 업체로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위성 셋톱박스 시장에서 유일한 외국 브랜드 제품으로 자리잡았다.

"휴맥스가 그동안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은 또다른 도전과 마주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도전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지만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 법입니다.

앞으로 휴맥스를 세계적인 디지털 가전업체로 성장시키겠습니다."

변 사장은 다시 태어나도 사업가를 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전 사업가로서 굉장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됐거든요.

만약 교수가 됐다면 좁고 깊게 갔겠죠.전 지금이 더 좋아요."

이공계 후배들이 창업과 취직,학문의 길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그는 뭐라고 조언할까.

"공부할 사람 있고 기업갈 사람 있고 그런 거겠죠? 그런데 뭔가 저질러 봐라 이렇게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발 안정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마라.괴롭고 힘들어도 그걸 넘어가야 인생이 넓어지는 거니까.

건물 하나 사가지고 임대료 받고 사는 인생은 너무 지루하지 않느냐 말이죠."

임도원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기부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