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마흔살)을 넘긴 나이에 사업가로 변신해 전형적인 '레드 오션'이었던 치킨 프랜차이즈 시장에 뛰어든 '무모한 사람'. 그러나 BBQ라는 브랜드로 창업 4년 만에 국내 최초로 가맹점 1000호점을 달성해 KFC,맥도날드 등 내로라 하는 다국적 업체들을 무릎 꿇리고 국내 시장을 평정한 거인. 토종 외식업계 최초로 중국 유럽 미국 동남아 등 해외시장에 잇달아 진출하며 세계시장 제패를 장담하고 있는 기업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신화'의 세계에 도전해 거칠 것 없는 진군을 거듭하고 있는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52)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윤홍근 회장은 전남 순천의 오지 마을인 풍덕동에서 낳고 자랐다.
4성 장군,판·검사,정치가 등 시골 소년이 한번쯤 꿈꿔 봤을 직업은 그의 동경 대상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까지 왕복 몇 십리를 걸어서 다녔다.
책과 공책,연필 등을 보자기로 쌓아 허리에 동여매고,고무신을 신고 통학한 것. 그러던 어느날 순천 시내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아버지께서 "선물이다" 하시며 책가방과 운동화를 건네주셨다.
그때의 환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끈한 가방과 튼튼한 운동화, 이런 걸 누가 만드는지를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기업에서 만드는 거란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결심하게 됐지요.
나도 크면 사람들에게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기업에 들어가 가능하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죠."
윤 회장은 1984년 학사 장교를 마치고 몇 군데 대기업에 지원했다.
그해 9월 제대를 앞두고 취직을 준비했는데,취업시즌이 아니라 공채시험을 보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었다.
학사장교 동기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총대'를 메고 동기생 취업희망자를 끌어모았더니 모두 430명이었다.
그들의 이력서를 하나의 자료로 만들어 현대,삼성 등 주요 그룹 인사담당자에게 돌리고 특별 전형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발품과 손품을 판 덕분에 전원이 합격한 것이다. 윤 회장은 지방대(조선대 무역학과) 출신으로 많은 서러움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조선대에 특별장학생으로 들어갔고,전체 수석으로 졸업한데다 군복무를 장교로 했는데도 사회에 나와 보니 이른바 명문대 꼴찌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다섯 배는 일했다고 한다.
그런 뼈를 깎는 노력 때문이었을까? 미원(현재 대상)의 닭고기 가공 자회사인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발령받아 일을 하다가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다.
그래서 회사에 건의했지만 사업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소식을 통보받는다.
대기업이 영세 자영업자들의 터전인 소형 치킨점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이미지에 좋지 않고,당시 치킨 프랜차이즈만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전형적인 '레드 오션' 분야라는 이유에서다.
"남들은 레드 오션이라고 봤을지 모르지만,제게는 요즘 유행하는 '블루 오션'으로 눈에 확 들어왔지요.
당시 치킨집들은 대부분 술을 팔면서 안주로 치킨을 파는 호프집이었습니다.
거기서 착안한 게 '닭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계층인 주부와 어린이들이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게 완전히 차별화하면 신개념의 새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윤 회장은 자본금 5억원을 마련해야 했는데,수중에는 2000만원뿐이었다.
전셋집을 월세로 바꿔 5000만원을 더 만들고,나머지 4억3000만원은 주변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다행히 친구나 선·후배들이 각자 1000만~3000만원 정도 잃는 셈치고 투자해 줬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줄임말 아닙니까.
위기 국면에서 상황을 정면으로 보면 빨려들어갈 수 있지만,그 뒷모습에는 언제나 기회의 얼굴이 숨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역발상으로 그 위기를 오히려 활용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계가 대부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어차피 외식하던 습관은 한번 들이면 못 끊는다.
그렇다면 외식 금액을 낮출 것이다.
쇠고기 등심을 먹던 가정이 돼지고기 삼겹살로,그래도 어려우면 4인 가족이 만원이면 해결되는 치킨으로 옮겨올 것이다'라고요.
이런 예측 아래 남들이 줄이기에 바빴던 언론광고를 대대적으로 늘렸고,덕분에 BBQ는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요."
윤 회장은 기업인 중 정주영·이병철·이건희 회장 세 분을 존경한다고 했다.
기업가로서 기업을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어 많이 쓸 수 있어 좋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에 대해선 일반인보다 자유롭겠지만,함부로 쓰지는 못해요.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펑펑 써보고 싶은 욕심 같은 것도 없지만.일정 금액 이상은 제 돈이 아니라 만인(萬人)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솔직히 회사 일에 묻혀 지내느라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어 돈을 못 쓴다고 한다.
"뭘 사모으는 취미도 없고 고생하는 임직원이나 가맹점 사장을 봤을 때 용돈을 집어주는 게 재미"라고 웃으며 말했다.
윤 회장 본인이 지방대학 출신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었던 만큼 회사 인사는 100% 능력 위주로 한다.
대표적인 예로 제너시스의 구슬김밥 브랜드인 '델리아띠'의 사업팀장을 꼽았다.
"이 사람은 전문대를 중퇴한 사람입니다.
3년 전 대학생이던 그 친구가 이메일을 보내 왔는데,김밥을 고급화시켜 프랜차이즈로 만드는 아이템을 제안해 왔죠. 사업계획서를 읽어 보니 기획팀에서 한 것보다 내용이 훨씬 낫습디다.
그래서 즉각 채용했습니다.
사원으로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시켰죠."
앞으로 그의 꿈은 '세계 최고 프랜차이즈 제국'을 건설하는 것. 2020년까지 전세계 5만개 점포를 일으켜 맥도날드를 따라잡고,이들 점포가 모두 성공하는 그날이 바로 제너시스가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 좌우명이자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바로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월급쟁이 시절부터 '내가 곧 사장이다'라는 생각으로 일했고,그랬기에 기업가로 변신할 기회도 포착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장성호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jas@hankyung.com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신화'의 세계에 도전해 거칠 것 없는 진군을 거듭하고 있는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52)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윤홍근 회장은 전남 순천의 오지 마을인 풍덕동에서 낳고 자랐다.
4성 장군,판·검사,정치가 등 시골 소년이 한번쯤 꿈꿔 봤을 직업은 그의 동경 대상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까지 왕복 몇 십리를 걸어서 다녔다.
책과 공책,연필 등을 보자기로 쌓아 허리에 동여매고,고무신을 신고 통학한 것. 그러던 어느날 순천 시내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아버지께서 "선물이다" 하시며 책가방과 운동화를 건네주셨다.
그때의 환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끈한 가방과 튼튼한 운동화, 이런 걸 누가 만드는지를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기업에서 만드는 거란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곧바로 결심하게 됐지요.
나도 크면 사람들에게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기업에 들어가 가능하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죠."
윤 회장은 1984년 학사 장교를 마치고 몇 군데 대기업에 지원했다.
그해 9월 제대를 앞두고 취직을 준비했는데,취업시즌이 아니라 공채시험을 보는 회사가 한 군데도 없었다.
학사장교 동기회장을 맡고 있던 그가 '총대'를 메고 동기생 취업희망자를 끌어모았더니 모두 430명이었다.
그들의 이력서를 하나의 자료로 만들어 현대,삼성 등 주요 그룹 인사담당자에게 돌리고 특별 전형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발품과 손품을 판 덕분에 전원이 합격한 것이다. 윤 회장은 지방대(조선대 무역학과) 출신으로 많은 서러움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조선대에 특별장학생으로 들어갔고,전체 수석으로 졸업한데다 군복무를 장교로 했는데도 사회에 나와 보니 이른바 명문대 꼴찌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다섯 배는 일했다고 한다.
그런 뼈를 깎는 노력 때문이었을까? 미원(현재 대상)의 닭고기 가공 자회사인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발령받아 일을 하다가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다.
그래서 회사에 건의했지만 사업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소식을 통보받는다.
대기업이 영세 자영업자들의 터전인 소형 치킨점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이미지에 좋지 않고,당시 치킨 프랜차이즈만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 전형적인 '레드 오션' 분야라는 이유에서다.
"남들은 레드 오션이라고 봤을지 모르지만,제게는 요즘 유행하는 '블루 오션'으로 눈에 확 들어왔지요.
당시 치킨집들은 대부분 술을 팔면서 안주로 치킨을 파는 호프집이었습니다.
거기서 착안한 게 '닭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계층인 주부와 어린이들이 깨끗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게 완전히 차별화하면 신개념의 새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윤 회장은 자본금 5억원을 마련해야 했는데,수중에는 2000만원뿐이었다.
전셋집을 월세로 바꿔 5000만원을 더 만들고,나머지 4억3000만원은 주변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다행히 친구나 선·후배들이 각자 1000만~3000만원 정도 잃는 셈치고 투자해 줬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줄임말 아닙니까.
위기 국면에서 상황을 정면으로 보면 빨려들어갈 수 있지만,그 뒷모습에는 언제나 기회의 얼굴이 숨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역발상으로 그 위기를 오히려 활용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계가 대부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어차피 외식하던 습관은 한번 들이면 못 끊는다.
그렇다면 외식 금액을 낮출 것이다.
쇠고기 등심을 먹던 가정이 돼지고기 삼겹살로,그래도 어려우면 4인 가족이 만원이면 해결되는 치킨으로 옮겨올 것이다'라고요.
이런 예측 아래 남들이 줄이기에 바빴던 언론광고를 대대적으로 늘렸고,덕분에 BBQ는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요."
윤 회장은 기업인 중 정주영·이병철·이건희 회장 세 분을 존경한다고 했다.
기업가로서 기업을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어 많이 쓸 수 있어 좋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에 대해선 일반인보다 자유롭겠지만,함부로 쓰지는 못해요.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펑펑 써보고 싶은 욕심 같은 것도 없지만.일정 금액 이상은 제 돈이 아니라 만인(萬人)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솔직히 회사 일에 묻혀 지내느라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어 돈을 못 쓴다고 한다.
"뭘 사모으는 취미도 없고 고생하는 임직원이나 가맹점 사장을 봤을 때 용돈을 집어주는 게 재미"라고 웃으며 말했다.
윤 회장 본인이 지방대학 출신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었던 만큼 회사 인사는 100% 능력 위주로 한다.
대표적인 예로 제너시스의 구슬김밥 브랜드인 '델리아띠'의 사업팀장을 꼽았다.
"이 사람은 전문대를 중퇴한 사람입니다.
3년 전 대학생이던 그 친구가 이메일을 보내 왔는데,김밥을 고급화시켜 프랜차이즈로 만드는 아이템을 제안해 왔죠. 사업계획서를 읽어 보니 기획팀에서 한 것보다 내용이 훨씬 낫습디다.
그래서 즉각 채용했습니다.
사원으로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시켰죠."
앞으로 그의 꿈은 '세계 최고 프랜차이즈 제국'을 건설하는 것. 2020년까지 전세계 5만개 점포를 일으켜 맥도날드를 따라잡고,이들 점포가 모두 성공하는 그날이 바로 제너시스가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 좌우명이자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바로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월급쟁이 시절부터 '내가 곧 사장이다'라는 생각으로 일했고,그랬기에 기업가로 변신할 기회도 포착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장성호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ja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