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대외비문건 유출 파장] '패' 다 보여주고 협상하면 미국에 끌려다닐텐데…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6차 협상을 앞두고 국회에 낸 비공개 문건이 협상 도중에 고스란히 누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언론이 '무역구제는 관심 사항 반영이 어려울 경우에도 여타 분야 협상에 활용하기 위해 미국 쪽을 계속 압박한다'는 등 한국의 협상 전략이 담긴 보고서를 보도하면서 '국민의 알권리가 중요하다'는 주장과 '국익이 현저히 침해될 경우 알권리에 앞선다'는 주장이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상대편에 우리측 전략이 노출돼 협상력이 크게 저하됐다며 국익에 중대한 침해가 생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는 '국민의 알권리'가 더 중요하다며 정부가 필요 이상의 과잉 대응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국익에 심대한 침해"

이번에 공개된 보고서는 지난 13일 한국 협상단이 국회에 보고한 비밀 문건으로 분과별로 △무역구제:"우리 요구 사항이 사실상 수용될 수 없다는 것 확인,관심 사항 반영이 어려울 경우에도 여타 분야 협상에 활용하기 위해 미국 쪽을 계속 압박한다." △섬유:"미국이 섬유 제품 관세를 조기에 철폐하거나 원산지 기준의 예외 조항을 삽입해주면 우리는 섬유 세이프가드(safeguard)와 우회수출방지 규정을 도입하자는 미국측 요구를 들어주는 것 고려한다" 등의 협상 쟁점과 그 대응전략을 담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무역구제는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강경책으로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왔는데 '이를 협상카드로 쓸 수 있다'는 내용이 공개돼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협상 전략을 알게 된 미국이 한국측 주장을 들어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재산권,금융 등 모든 분과가 마찬가지다.

정부 관계자는 "FTA는 양국 협상이 끝나더라도 국회의 비준을 거쳐야 정식으로 발효된다.

협상이 끝난 뒤 협상 결과가 불리하고 잘못됐다면 이를 따져 비준을 하지 않으면 된다"며 "협상 와중에 전략을 노출시켜 협상력을 약화시켜 국익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고 말했다.

◆"국민 알권리 먼저"

이에 대해 심상정 민노당 의원은 "기밀이나 대외비 기준을 누가 정하는 것인가"라고 묻고,"정부가 적법한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대외비라고 정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대외비 운운하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국회를 우롱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심 의원은 "누가 문서를 누출했느냐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문서의 내용이 문제"라며 "언론에 유출된 내용 중 무역구제 부분 추가 양보는 주지의 사실이고 금융 부분은 재경부 담당자가 정부정책 홍보지인 '나라경제' 등을 통해 밝힌 부분인 만큼 문서에는 비밀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없다"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이번 사태가 오히려 고위급 비밀 협상을 앞두고 비밀주의를 강화하고 협상 내용 은폐에 기여한다면 X파일 이상의 범죄가 될 것"이라며 "유출된 문서가 진정으로 국익에 치명적인 해를 깨치고 지장을 준다면 내가 나서서 책임지겠다"고 덧붙였다.

◆국익에 대한 판단 기준이 중요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국민의 알권리는 중요하지만 '국익'에 현저하게 해가 된다면 대외비 문서를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회 FTA특위 열린우리당 간사인 송영길 의원도 "국민의 알권리가 중요하다지만 국가의 구체적 협상전략까지 모조리 보도한 언론도 지나쳤다"고 지적했다.

어느 나라도 국익과 관련된 국가 기밀 유출 행위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이유로 정당화시켜 주는 곳은 없다.

알권리가 국익을 해쳐가면서까지 국가 기밀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샅샅이 알아야 할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익에 대한 판단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주관적 입장이 아니라,국민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역대표부(USTR)가 FTA 진행 상황에 대해 수시로 의회 내의 COG(Congressional Oversight Group)에 보고하지만 보고 내용은 엄격히 비밀로 유지되고 한번도 흘러나온 적이 없다.

미국은 의회에 보고한 문건이 유출될 경우 민·형사상 책임까지 묻는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민에 대한 정보 공개도 필요하지만 협상을 위한 기밀 유지 역시 중요하다"며 "정보 공개가 협상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일정한 선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석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realist@hankyung.com


정부 제정 추진 … 시민단체 등 반대

비밀보호법도 논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관련된 비공개 문건 유출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비밀 범위를 통상·과학·기술 등 국가이익 개념으로 대폭 확대하고,비밀 누설 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조항을 담은 비밀보호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대통령령인 '보안업무 규정' 등에 의해 사실상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임의로 비밀등급을 매길 수 있도록 해와,비밀 가치가 없는 기록물이 과도하게 비밀로 분류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비밀의 관리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마련하고 입법예고했다.

제정안은 비밀의 개념을 "누설되는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 및 통상·과학·기술 등 국익에 명백한 위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사실·물건·지식"으로 확대했으며,'대외비'를 없애고 'ⅠⅡⅢ급' 체제를 유지했다.

또 비밀의 범위를 △전시계획·비상대비계획 △국가안보 정책 및 위기관리 △통일·외교·통상 관련 사항 △국방정책,군사전략·작전 및 무기 개발·운용 △국가정보활동 및 암호체계 △국익과 관련된 과학,기술,정보통신 사항 △기타 국가안보와 국익에 명백한 위해를 초래하는 사항 등 7가지를 명시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법령 위반 사실이나 행정상 과오,업무상 과실 등을 은폐하기 위한 경우와 보호 가치가 없는 정보의 공개를 제한하려는 때에 대해서는 비밀로 지정할 수 없도록 지정 요건을 엄격히 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은 '국가안보법',영국은 '정보보호법 및 공무기밀법',중국과 대만은 '국가기밀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실련 등 시민사회단체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비밀의 범주를 판단하고 처벌 수위를 강화한 법률을 명문화할 경우 취재 제한과 인권 침해 등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위험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