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귀족 가문 출신,명망가,재산가 등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ilge)'를 지속적으로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대 로마의 지도층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자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유럽 등 서양 역사 속에 굳건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현대에 와서도 '사회 고위층 인사들은 일반인보다 강도 높은 사회적 의무를 부여받는다'는 내용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죽는 것이 귀족의 '명예'

이 같은 '공공 의무'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쟁 참여다.

서양의 각국에서는 귀족 등 고위층이 전쟁에 앞장 서 참여하는 전통이 오래 전부터 확고하다.

일례로 고대 로마가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만 사망한 집정관(콘술) 수가 13명에 달했다.

16년간 이어진 전쟁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국가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이 직접 참전해 줄줄이 목숨을 내놓았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이처럼 500년 역사 동안 로마의 귀족들은 수많은 전투에 앞장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러다 보니 출범 초기 귀족이 대부분이던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나중에는 15분의 1까지 줄었다고 한다.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서양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켜진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영국의 전통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이튼스쿨 건물에는 1,2차에 걸친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이 학교 졸업생 2000여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튼스쿨 학생들은 모교가 역대 영국 총리 19명을 배출한 학교라는 것보다는 선배 중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2000여명의 참전 용사가 있다는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다.

1차 대전 때 독일의 귀족 리흐트호헨 남작의 일화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유명하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는데 자신이 탑승한 지휘관기가 적군의 눈에 가장 잘 띄도록 새빨갛게 칠해 전투기 편대의 최선봉에서 싸우다 스물여섯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독일인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붉은 남작'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전쟁 상황에서 보여준 서양의 귀족 또는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은 이들에 대한 대중의 존경을 만들고 사회 통합의 구심점이 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위계층을 힘으로 찍어 눌러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바탕으로 그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참여와 기부의 전통으로도 이어져

프랑스혁명을 통해 가장 먼저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에서는 그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귀족의 앞장 선 전쟁 참여'보다는 '지식인의 사회 참여(앙가주망,engagement)'라는 형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식인은 문화적 '샹(champs,영역)'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문화적 지배층"이라며 "자신의 지식과 혜안을 사회적 이슈 해결에 실천적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인 '드레퓌스 사건''68혁명' 등에서 보여준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 의식은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에서 활발한 '기부 문화'도 실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등지에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거액의 기부금을 사회에 내놓곤 한다.

서양의 선진국들은 대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 시장경제 원칙에 따른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차가운 사회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서양사회가 오늘날까지 굳건한 사회 통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khcha@hankyung.com


[ 서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생각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진 조각가 오귀스트 르네 로댕은 1884년 프랑스 칼레시(市)의 의뢰를 받아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이 작품에 표현된 6명의 인물은 프랑스의 북부 도시 칼레가 1347년 영국군에 의해 포위됐을 때 시민을 대신해 교수형을 자처한 귀족들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와중에 영국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칼레는 지원군조차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칼레의 항복 사절단은 당시 원정군을 이끌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시민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에드워드 3세는 조건을 한 가지 내걸었다.

"항복한다면 시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저항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는 치러야 한다.

만약 시민 모두가 몰살당하는 대신 상징적인 의미에서 교수형을 당할 대표가 나온다면 다른 이들의 안전은 보장하겠다.

칼레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이를 골라 교수형에 쓸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보내라."

이 얘기가 칼레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동요했다.

목숨을 건지게 됐다는 안도와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막막함이 교차했던 것.마침 귀족 중에서 한 사람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오며 외쳤다.

"칼레의 대표 시민이여.나와 함께 가자.용기를 가지고."

곧바로 시장이 나섰고,그의 아들도 뒤를 따랐다.

칼레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부자도 나왔다.

하나같이 귀족이나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었다.

시민을 위한 희생을 자처한 이들은 담담히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나아갔다.

예정된 처형이 집행되기 직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에 못 이겨 이 용감한 칼레 시민 6명을 살려줬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 6명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