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심각한 사회 문제,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한밤중에 벌어지는 TV토론 사회자의 마무리 인사말에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국민들도 무의식적으로 '정부 역할론'을 펴는 경우가 많다. 버스 요금이 올랐을 때,한밤중에 정전이 계속될 때,집 앞 신호등이 고장났는 데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을 때 등 답답한 순간마다 우리는 손쉽게 '정부'를 욕하거나,'정부'에 무언가 호소하고 싶어지거나,'정부'에 대해 불만을 터트린다. 해방 이후 수십년간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무슨 일이든 '정부 주도'로 해 온 경험이 국민들에게 '정부 의존증'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정부는 브레이크 없는 몸집 불리기를 계속해 왔다. 그동안 사회안전망 확대와 분배 복지를 위한 세금 인상 필요성을 제기하며 공공서비스 확대를 이유로 공무원 숫자를 계속 늘렸다. 현 정부의 가장 큰 지지세력인 진보진영과 시민단체의 다양한 요구도 한몫 했다.

◆큰 정부 치고 일 잘하는 경우 없다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달 초 정년퇴임 기념 고별강연에서 "노무현 정부엔 인력이 남아돌고 필요 없는 조직이 상존하며 중복되는 기능도 허다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는 비능률을 반복하며 필요 없는 일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장 시급한 일은 규제를 줄이는 일인데 정부는 아직 공공.민간 부문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비대해진 정부조직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를 주도한 청와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나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큰 정부가 아니라 효율적인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지난 7월까지 공무원이 2만3000명이나 늘어난 가운데 정부 각 부처들은 한 술 더 떠 대선을 앞 둔 내년이 조직을 키울 마지막 기회인 양,조직의 신설.확대 등을 담은 개편안을 대거 준비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최종찬씨는 "작은 정부 대신 현 정부가 주장하는 '효율적인 정부'는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어렵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관료조직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직업이 안정돼 있고 정부가 망한다는 걱정도 없어 일하는 강도가 민간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급여가 획일적이기 때문에 업무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어렵고 성과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 세금으로 일을 추진하므로 경영 마인드가 부족하고 비용 개념이 없어 성과를 불문하고 일을 벌이고 본다. 따라서 그는 "정부 역할을 줄이고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민간에 맡겨야 효율이 난다"고 강조했다.

최 전 장관은 대표적인 비효율 사례로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운영하던 정부과천청사 내 자장면 식당의 일화를 들었다. 이 식당은 매일 낮 12시40분께면 '재료가 떨어졌다'며 청소를 시작하곤 했다. 보다 못해 "준비를 더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하자,직원이 "남으면 선생님이 드실 거냐"고 반문했다는 것. 또 "식당에는 식권을 나눠주는 직원과 회수하는 직원이 5m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이 일을 한 명이 하고 조금만 서비스를 개선해도 매출액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 이후 '왜 소련이 망했는지 알려면 정부과천청사 구내식당에 가 보면 된다'는 농담을 했다"고 회상했다.

◆늘어난 공무원 수는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관료조직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그것을 국민 부담으로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공무원 인력이 늘면서 그에 따른 인건비는 이미 1조원 이상 초과 지출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세수가 부족하다며 세금을 더 걷을 움직임을 보일 뿐 공무원 조직 확대는 멈추지 않고 있다.

늘어나는 세금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들은 늘어난 자리 만큼 민간 부문에 대한 규제와 개입을 강화하게 되고,이것이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행정학에서 거론되는 '니스카넨 모형'이 이를 설명해준다. 니스카넨은 관료들이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가와는 달리 직접 이윤을 얻기는 어려우므로 직책상의 특권,사회적 명성 및 영향력 등을 얻으려 한다고 설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단 자리를 꿰차고 앉으면 자꾸만 권한을 늘리려 하는 게 관료조직의 특성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필요 이상의 공공서비스가 난립하게 되고,그만큼 민간 부문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경쟁과 시장원리에 바탕을 둔 사회의 효율성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khcha@hankyung.com


[ 일본은 '작은정부'로 10년 불황 극복 ]

일본은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이 붕괴된 뒤 10년 이상 불황을 겪었다. 이를 두고 흔히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이 같은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정부'를 지향한 개혁정책의 성과라는 진단이 지난 12일 우리나라 국책 연구기관에서 나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일본 경제 구조개혁 정책의 평가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일본이 사회보장이나 공공투자 부문에 대한 정부 역할을 줄인 결과,민간 부문에 활력이 생겨 경제 회생의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했다.

KIEP는 2000년을 전후해 이런 방향으로 일본 정부가 추진한 구조개혁이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진단은 '국토 균형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각종 개발 사업을 정부 주도로 추진하고,비전2030 계획을 통해 천문학적인 증세(增稅)가 필요한 복지 정책을 내놓은 현 정부의 정책 방향과는 크게 어긋나는 내용이다.

정성춘 KIEP 일본팀장은 "일본이 경제 구조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가 먼저 불황의 원인을 재점검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며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야 처방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내린 결론은 불황의 근본 원인이 공공투자 확대 등 공급측면의 비효율에서 비롯됐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이 붕괴된 뒤 10년 이상 지속된 불황의 원인을 유효 수요의 부족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비대해진 정부가 과도하게 역할을 하려고 나서면서 민간 부문의 활력을 저해한 것이 문제였다는 쪽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불황 극복을 위해 정부의 역할 축소에 나섰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집권 직후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내걸고 공공 부문의 몸집을 줄이는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또 중앙정부가 껴안고 있던 각종 공적 복지서비스를 지방정부에 이양하는 한편 민간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책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