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53)은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음악이면 음악,미술이면 미술,뭐가 화제로 등장해도 서너시간은 족히 대화를 이끌 수 있을 정도다.
1980년 부인 정혜욱씨와 맞선을 보던 날,그는 음악 얘기만 했다.
공대 출신의 해군장교가 바로크시대 궁중음악에서부터 하이든,모차르트에 이르기까지 고전파 클래식을 술술 읊어대자 연세대 음대를 나온 부인은 깜짝 놀랐다.
대학시절 그는 국립극장의 500원짜리 C석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공릉동에서 장충동까지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다녔다.
부산고 시절 합창반 활동을 통해 닦은 노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다.
황 사장은 구한말 사군자 중 매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 곁을 지켜 더욱 유명했던 화원화가(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에서 일하던 직업화가) 황매산 선생의 친손자다.
조부의 영향을 받았는지 미술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서울대 공대의 테니스 대표선수로 몇몇 대회에 나가 우승도 했다.
고도의 집중력과 미세한 스윙감각이 요구되는 골프 역시 정상급이다.
공식 핸디캡은 6이지만 이븐파 스코어도 여러 번 냈다.
황 사장의 고교 시절 꿈은 물리학자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 경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 번에 걸친 IQ 테스트 결과는 138과 140.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정통 물리보다는 각종 실험을 통해 물리 이론을 재구성해 보는 실용 물리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가라는 가족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전기공학과를 가게 됐지요."
서울대 공대시절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해오던 그는 3학년 때인 1975년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서적과 접하게 된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가 쓴 반도체 이론서 'Physics of Semiconductor Device'였다.
반도체에 후기 산업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직감한 그는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어 1977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윌리엄 쇼클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꿈은 보다 구체화된다.
쇼클리 같은 위대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것.해군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5년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면 누구든 편히 쉬며 보상을 받고 싶어하지만 황 사장은 IBM이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스탠퍼드의 책임연구원으로 옮겨갔다.
"연구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학교 가까이에 실리콘밸리가 있어 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윌리엄 쇼클리 같은 대가들도 직접 만날 수 있게 돼 개인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은 학구열은 엄청난 횟수의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학생도 아닌 연구원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자 교수진들은 깜짝 놀랐다.
스탠퍼드는 이 열성적인 동양 청년이 연구원 생활을 겸하면서 인텔에 자문을 하도록 허락해 줬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업체 인텔의 기술력을 들여다 보며 생각과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의 후두부를 자극한 쪽은 일본 반도체업계였다.
"같이 일하던 교수의 소개로 일본 반도체업체들을 둘러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80년대 말 NEC나 히타치 같은 일본 반도체 메이커들은 세계 반도체산업의 중심이고 최전방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전자소재학회인 IEDM 심포지엄도 일본어로 진행될 정도였으니까요.
비로소 일본을 넘어서야 세계 최고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1989년 4월 황 사장은 마침내 4년6개월에 걸친 스탠퍼드 연구원 생활을 접고 귀국,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당초 삼성이 제의한 조건은 기사와 아파트가 딸린 계약직 임원.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돈이나 지위가 탐났더라면 다국적 기업을 옮겨다니며 몸값을 올리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일본을 꺾기 위해 삼성에 뿌리를 박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 나이나 경력을 감안할 때 단숨에 임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아 거절했던 거예요."
처음 받은 직위는 부장과 이사 사이의 '담당'이라는 것이었다.
내심 1년 정도 착실하게 일하면 임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처음 접하는 한국의 직장생활은 쉽지 않았다.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해 직원들과의 융화도 어려웠다.
상명하복식 의사결정 같은 한국식 관습과 관행은 서구식 토론문화에 익숙한 그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기대했던 임원 승진은 2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방인의 괴로움 같은 스트레스가 짓눌러왔다.
"돌이켜 보면 삼성이 저를 테스트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황창규도 없었겠지요."
1991년 말 이사가 되면서 당시 삼성전자의 숙원 프로젝트였던 256메가 D램 개발 책임을 맡게 됐다.
무수한 토의와 실험을 거치는 개발과정을 거쳐 1994년 8월 마침내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94년 상무,1998년 전무,1999년 부사장을 거쳐 2000년에 대표이사를 겸한 메모리 사업부장이 되고 2004년 1월엔 반도체 총괄사장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 같은 성취보다 더욱 윤기나는 것은 황 사장의 일상이다.
황 사장은 1989년 귀국한 이후 지금껏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40평이라고는 하지만 부인,세 자녀와 함께 살기엔 그다지 넓지 않다.
공부 벌레였던 그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서적들과 기술 자료들이 방 한 칸을 점령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애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제가 이야기를 하죠.'불편할 것 없잖아.나는 잠만 자면 되는 사람이고 컴퓨터 쓸려면 아빠가 양보할게.나는 이렇게 있으니 너희들 얼굴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좋은데…'라고 말이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음악이면 음악,미술이면 미술,뭐가 화제로 등장해도 서너시간은 족히 대화를 이끌 수 있을 정도다.
1980년 부인 정혜욱씨와 맞선을 보던 날,그는 음악 얘기만 했다.
공대 출신의 해군장교가 바로크시대 궁중음악에서부터 하이든,모차르트에 이르기까지 고전파 클래식을 술술 읊어대자 연세대 음대를 나온 부인은 깜짝 놀랐다.
대학시절 그는 국립극장의 500원짜리 C석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공릉동에서 장충동까지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다녔다.
부산고 시절 합창반 활동을 통해 닦은 노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다.
황 사장은 구한말 사군자 중 매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 곁을 지켜 더욱 유명했던 화원화가(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에서 일하던 직업화가) 황매산 선생의 친손자다.
조부의 영향을 받았는지 미술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서울대 공대의 테니스 대표선수로 몇몇 대회에 나가 우승도 했다.
고도의 집중력과 미세한 스윙감각이 요구되는 골프 역시 정상급이다.
공식 핸디캡은 6이지만 이븐파 스코어도 여러 번 냈다.
황 사장의 고교 시절 꿈은 물리학자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 경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 번에 걸친 IQ 테스트 결과는 138과 140.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정통 물리보다는 각종 실험을 통해 물리 이론을 재구성해 보는 실용 물리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가라는 가족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전기공학과를 가게 됐지요."
서울대 공대시절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해오던 그는 3학년 때인 1975년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서적과 접하게 된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가 쓴 반도체 이론서 'Physics of Semiconductor Device'였다.
반도체에 후기 산업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직감한 그는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어 1977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윌리엄 쇼클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꿈은 보다 구체화된다.
쇼클리 같은 위대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것.해군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5년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면 누구든 편히 쉬며 보상을 받고 싶어하지만 황 사장은 IBM이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스탠퍼드의 책임연구원으로 옮겨갔다.
"연구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학교 가까이에 실리콘밸리가 있어 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윌리엄 쇼클리 같은 대가들도 직접 만날 수 있게 돼 개인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은 학구열은 엄청난 횟수의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학생도 아닌 연구원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자 교수진들은 깜짝 놀랐다.
스탠퍼드는 이 열성적인 동양 청년이 연구원 생활을 겸하면서 인텔에 자문을 하도록 허락해 줬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업체 인텔의 기술력을 들여다 보며 생각과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의 후두부를 자극한 쪽은 일본 반도체업계였다.
"같이 일하던 교수의 소개로 일본 반도체업체들을 둘러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80년대 말 NEC나 히타치 같은 일본 반도체 메이커들은 세계 반도체산업의 중심이고 최전방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전자소재학회인 IEDM 심포지엄도 일본어로 진행될 정도였으니까요.
비로소 일본을 넘어서야 세계 최고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1989년 4월 황 사장은 마침내 4년6개월에 걸친 스탠퍼드 연구원 생활을 접고 귀국,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당초 삼성이 제의한 조건은 기사와 아파트가 딸린 계약직 임원.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돈이나 지위가 탐났더라면 다국적 기업을 옮겨다니며 몸값을 올리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일본을 꺾기 위해 삼성에 뿌리를 박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 나이나 경력을 감안할 때 단숨에 임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아 거절했던 거예요."
처음 받은 직위는 부장과 이사 사이의 '담당'이라는 것이었다.
내심 1년 정도 착실하게 일하면 임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처음 접하는 한국의 직장생활은 쉽지 않았다.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해 직원들과의 융화도 어려웠다.
상명하복식 의사결정 같은 한국식 관습과 관행은 서구식 토론문화에 익숙한 그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기대했던 임원 승진은 2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방인의 괴로움 같은 스트레스가 짓눌러왔다.
"돌이켜 보면 삼성이 저를 테스트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황창규도 없었겠지요."
1991년 말 이사가 되면서 당시 삼성전자의 숙원 프로젝트였던 256메가 D램 개발 책임을 맡게 됐다.
무수한 토의와 실험을 거치는 개발과정을 거쳐 1994년 8월 마침내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94년 상무,1998년 전무,1999년 부사장을 거쳐 2000년에 대표이사를 겸한 메모리 사업부장이 되고 2004년 1월엔 반도체 총괄사장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 같은 성취보다 더욱 윤기나는 것은 황 사장의 일상이다.
황 사장은 1989년 귀국한 이후 지금껏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40평이라고는 하지만 부인,세 자녀와 함께 살기엔 그다지 넓지 않다.
공부 벌레였던 그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서적들과 기술 자료들이 방 한 칸을 점령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애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제가 이야기를 하죠.'불편할 것 없잖아.나는 잠만 자면 되는 사람이고 컴퓨터 쓸려면 아빠가 양보할게.나는 이렇게 있으니 너희들 얼굴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좋은데…'라고 말이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