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역 플랫폼에 봄을 시샘하는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969년 3월2일 밤. 카바이트 등불을 매단 노점상 리어카에서 냄비 우동 한 그릇을 급하게 비운 깡마른 젊은이가 역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방인의 낯선 눈길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역전 모퉁이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길을 재촉하는 시발(始發)택시의 차창 밖으로 적막에 쌓인 포항시내의 밤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미군 군용차량을 개조해 만든 택시가 한참을 덜덜거리며 달려가 내려준 곳은 '상주여관'. 당시 포항에 있던 두 개의 여관 중 하나였다.
"여관방에 누워 생각하니 한심합디다. 내일이면 첫 출근이라는 기쁨에 앞서 도대체 이 '깡촌'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싶더라고요."
하지만 다음 날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에 자리잡은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 현장에는 더욱 기가 막힌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과 맞닿은 350만평의 부지는 온통 모래뻘이었다. 하얀 백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준설(浚渫)을 위해 파 올린 진흙 모래들이 볼썽사납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37년 전 포항종합제철 첫 출근 길에 나선 이구택 포스코 회장(60)이 맞닥뜨린 풍경이다. 포철 창립멤버이자 대학시절(서울대 금속공학과) 스승인 윤동석 교수(1993년 작고)의 권유로 입사하긴 했지만 첫 눈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철강을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런데 과연 이런 곳에서 철이 나올까?"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거센 모래바람과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바람이 한번 불면 누런 모래들이 순식간에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현장에 갈 때는 분명히 있었던 길이 돌아올 때는 없어지기 일쑤였다. 파도는 더 무서웠다. 갑자기 밀어닥친 해일에 준설선이 바람개비처럼 나뒹굴고 수많은 준설 파이프들이 동강동강 끊어져 나갔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이 회장의 일상을 깨운 것은 언젠가 밤 일을 마치고 현장 직원들과 쓴 소주를 마실 때였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처럼 서울에서 막 내려와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이 곳은 꿈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야. 우리 모두는 한 가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 척박한 이 땅에 공장을 세워 뜨거운 쇳물을 뽑아내는 게 바로 우리의 꿈이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거창한 슬로건보다,철강대국이라는 비현실적인 수사보다도 훨씬 가슴 뭉클한 얘기였다. 수습을 마치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은 서울 본사의 기획관리부. 현장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공사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수시로 포항을 오르내려야 했다.
1971년 추석 때는 명절 쇠러 귀향한 근로자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려갔다. 하루 평균 500㎥에 이르던 콘크리트 타설량을 700㎥로 늘리라는 당시 박태준 포철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낮에 뙤약볕 아래서 작업을 하고 나면 밤에는 바닷가의 극성스런 모기떼에 시달렸다. 어쩌다 동료가 권한 소주잔에 취해 파도 잔잔한 백사장의 그림같은 고요를 감상 할라치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레미콘을 가득 실은 트럭의 굉음이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땐 정말 힘들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남들은 다 집에서 송편에 술 한잔씩 나누고 있을 때 공사판에서 소주잔 기울이는 기분이 어떠했을지."
1972년 2월,다시 포항 현장의 엔지니어로 복귀한 이 회장은 열연공장 기술계에 배치됐다. 현장 인근의 민가에서 합숙하던 이 회장은 그 시절 총각 사원들이 그랬듯이 속옷과 양말을 제대로 갈아입기 힘들었다. 합숙소는 모래바람에 젖은 땀 냄새와 오래된 음식 냄새들이 뒤엉켜 항상 퀘퀘했다.
"저는 '부선망 독자(父先亡 獨子)' 규정에 따라 군대를 면제받았습니다. 입사한 지 3년 정도가 지나자 병역을 마친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게 됐지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뭐라 한지 아세요? '야! 여기는 사람 살데가 못된다. 절대로 오지마라'고 했어요."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청상(靑孀)이 돼 홀로 1남2녀를 키운 모친 허순씨(83)는 이 회장의 결혼을 서둘렀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포항은 미혼여성들이 시집오기를 꺼리는 외진 곳이었다. 결국 입사한 지 7년이 지난 1976년에야 이정란씨(53)와 '중매 반,연애 반'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1977년 열연기술과장이 된 뒤 1년쯤 지나자 석유시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 휴스턴지사로 발령이 났다. 시추에 필요한 강재 판매 확대 가능성을 타진해보라는 지시와 함께였다. 나름대로 해외영업에 눈을 뜬 이 회장은 1980년 5월 귀국해 수출부를 지원했다. "본격적으로 영업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에 박 사장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 사장은 이미 그를 미래의 최고경영자(CEO)감으로 점 찍어둔 상태였다고 한다. 앞날은 순탄대로였다. 1986년 경영정책부장이 돼 회사 전반의 전략을 컨트롤하는 자리에 앉았다. 1988년엔 이사로 승진해 3년여간 신사업본부장을 맡았다. 전.현직을 통틀어 이 회장 만큼 다양한 부서를 섭렵해본 사람은 없다. 1994년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리인 제철소장이 됐다.
"공대를 나와 제철소장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제가 CEO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평생 마실 술의 대부분을 그 시절 마셨다. 현장의 주임 반장들과 어울려 이제는 말끔하게 단장된 도로와 화단을 바라보며 옛날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중천에 이글거리던 태양과 눈을 못뜨게 했던 모래바람,그리고 방파제도 없던 해안가를 들이치던 집채같은 파도들을…. 그리고 또 그 시절의 꿈과 청춘을 얘기했다.
그는 CEO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주저없이 역사의식을 꼽았다. 35년 전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섰던 뭇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견인차였다면 지금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여관방에 누워 생각하니 한심합디다. 내일이면 첫 출근이라는 기쁨에 앞서 도대체 이 '깡촌'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싶더라고요."
하지만 다음 날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에 자리잡은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 현장에는 더욱 기가 막힌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과 맞닿은 350만평의 부지는 온통 모래뻘이었다. 하얀 백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준설(浚渫)을 위해 파 올린 진흙 모래들이 볼썽사납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37년 전 포항종합제철 첫 출근 길에 나선 이구택 포스코 회장(60)이 맞닥뜨린 풍경이다. 포철 창립멤버이자 대학시절(서울대 금속공학과) 스승인 윤동석 교수(1993년 작고)의 권유로 입사하긴 했지만 첫 눈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철강을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런데 과연 이런 곳에서 철이 나올까?"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거센 모래바람과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바람이 한번 불면 누런 모래들이 순식간에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현장에 갈 때는 분명히 있었던 길이 돌아올 때는 없어지기 일쑤였다. 파도는 더 무서웠다. 갑자기 밀어닥친 해일에 준설선이 바람개비처럼 나뒹굴고 수많은 준설 파이프들이 동강동강 끊어져 나갔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이 회장의 일상을 깨운 것은 언젠가 밤 일을 마치고 현장 직원들과 쓴 소주를 마실 때였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처럼 서울에서 막 내려와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이 곳은 꿈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야. 우리 모두는 한 가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 척박한 이 땅에 공장을 세워 뜨거운 쇳물을 뽑아내는 게 바로 우리의 꿈이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거창한 슬로건보다,철강대국이라는 비현실적인 수사보다도 훨씬 가슴 뭉클한 얘기였다. 수습을 마치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은 서울 본사의 기획관리부. 현장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공사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수시로 포항을 오르내려야 했다.
1971년 추석 때는 명절 쇠러 귀향한 근로자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려갔다. 하루 평균 500㎥에 이르던 콘크리트 타설량을 700㎥로 늘리라는 당시 박태준 포철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낮에 뙤약볕 아래서 작업을 하고 나면 밤에는 바닷가의 극성스런 모기떼에 시달렸다. 어쩌다 동료가 권한 소주잔에 취해 파도 잔잔한 백사장의 그림같은 고요를 감상 할라치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레미콘을 가득 실은 트럭의 굉음이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땐 정말 힘들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남들은 다 집에서 송편에 술 한잔씩 나누고 있을 때 공사판에서 소주잔 기울이는 기분이 어떠했을지."
1972년 2월,다시 포항 현장의 엔지니어로 복귀한 이 회장은 열연공장 기술계에 배치됐다. 현장 인근의 민가에서 합숙하던 이 회장은 그 시절 총각 사원들이 그랬듯이 속옷과 양말을 제대로 갈아입기 힘들었다. 합숙소는 모래바람에 젖은 땀 냄새와 오래된 음식 냄새들이 뒤엉켜 항상 퀘퀘했다.
"저는 '부선망 독자(父先亡 獨子)' 규정에 따라 군대를 면제받았습니다. 입사한 지 3년 정도가 지나자 병역을 마친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게 됐지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뭐라 한지 아세요? '야! 여기는 사람 살데가 못된다. 절대로 오지마라'고 했어요."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청상(靑孀)이 돼 홀로 1남2녀를 키운 모친 허순씨(83)는 이 회장의 결혼을 서둘렀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포항은 미혼여성들이 시집오기를 꺼리는 외진 곳이었다. 결국 입사한 지 7년이 지난 1976년에야 이정란씨(53)와 '중매 반,연애 반'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1977년 열연기술과장이 된 뒤 1년쯤 지나자 석유시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 휴스턴지사로 발령이 났다. 시추에 필요한 강재 판매 확대 가능성을 타진해보라는 지시와 함께였다. 나름대로 해외영업에 눈을 뜬 이 회장은 1980년 5월 귀국해 수출부를 지원했다. "본격적으로 영업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에 박 사장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 사장은 이미 그를 미래의 최고경영자(CEO)감으로 점 찍어둔 상태였다고 한다. 앞날은 순탄대로였다. 1986년 경영정책부장이 돼 회사 전반의 전략을 컨트롤하는 자리에 앉았다. 1988년엔 이사로 승진해 3년여간 신사업본부장을 맡았다. 전.현직을 통틀어 이 회장 만큼 다양한 부서를 섭렵해본 사람은 없다. 1994년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리인 제철소장이 됐다.
"공대를 나와 제철소장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제가 CEO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평생 마실 술의 대부분을 그 시절 마셨다. 현장의 주임 반장들과 어울려 이제는 말끔하게 단장된 도로와 화단을 바라보며 옛날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중천에 이글거리던 태양과 눈을 못뜨게 했던 모래바람,그리고 방파제도 없던 해안가를 들이치던 집채같은 파도들을…. 그리고 또 그 시절의 꿈과 청춘을 얘기했다.
그는 CEO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주저없이 역사의식을 꼽았다. 35년 전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섰던 뭇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견인차였다면 지금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