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 정진구 CJ푸드빌 사장
1972년 삼립식품 구매부의 한 신입사원이 경상북도 문경의 나환자촌을 찾았다. 그는 주민들을 만나 무작정 계란을 달라고 졸랐다. 도매상들에게 공급하는 가격보다 훨씬 높게 쳐 줄 테니 삼립식품과 직거래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외지인들을 쉽게 믿지 않는 나환자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이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를 몇 차례,청년은 아예 서울에서 짐을 싸들고 나환자촌으로 내려갔다. 손가락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목욕을 시켜 주고 밤에는 함께 소주도 마셨다.

청년이 신입사원 신분으로 계란 확보에 이처럼 고집스럽게 매달렸던 사연은 이렇다. 당시 삼립식품의 주력 제품은 계란을 주 원료로 하는 카스테라. 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나 봄 가을 소풍철만 되면 어김없이 재연되는 '계란 파동'으로 원료 확보에 애를 먹었다. 지금이야 대형 양계장들이 널려 있지만 그 때는 국내 계란 공급의 70%를 경북 안동,칠곡 등에 산재한 나환자촌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방법은 그들과의 직거래를 트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청년이 시도하기 전까지는 회사 내 어느 누구도 나환자촌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 격려는커녕 오히려 무모한 짓을 한다며 질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청년은 나환자들과 생활한 지 석 달여 만에 직거래를 성사시켰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자 나환자들은 서울 일부 도매상들과의 거래를 끊으면서 삼립식품과 거래를 텄다.

외식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는 정진구 CJ푸드빌 사장(61)이 보낸 젊은 날의 일화다. 정 사장은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삼립식품에 몸담았던 2년9개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국적 식품기업에서 대부분의 직장 생활을 보냈다. 한때는 고달픈 이민자로서 미국 편의점의 말단 점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농사꾼이었다. 삼미사 부회장을 지냈고 평소 농사에 관심이 많던 부친 정용모씨(1981년 작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1965년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해 1971년 6월 삼립식품에 취업한 것도 농사와 식품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실제 정 사장이 군 복무를 마쳤을 때는 부친이 과천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농지와 과수원 터를 매입해 둔 상태였다. 1974년 3월 그는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형식만 '이민'이지 선진 식품산업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부인과 함께 정착한 곳은 미국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무작정 떠난 이민이니 먹고 살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어느날 종업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집 근처의 24시간 편의점인 '세븐 일레븐'을 찾아 들어갔다. 세븐 일레븐의 보수는 시간당 3달러. 반면 업무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로 더없이 고된 일이었다. 그는 매장에 비치돼 있는 편의점 운영 매뉴얼을 달달 외운 뒤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적기 시작했다. 과거 나환자촌과의 계란 직거래를 성사시켰던 때처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묵묵하게 해 나갔다. 하루 3교대 근무에 일일 보고가 하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각 근무 교대자들이 올리는 매출 합계와 실제 금고에 들어 있는 돈이 매일 달랐다. 정 사장은 점포 매니저에게 금전등록기를 들여놓을 것을 제안했다. 매출이 발생할 때마다 금전등록기에 입력하고 이를 토대로 시간대별 매출 합계를 기록토록 했다.

볼티모어의 작은 편의점에 들여놓은 금전등록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내 6800개 전 점포에 확산됐다. 정 사장은 점원 생활 4개월 만에 부점장으로 승진했다. 부점장이 되고 나서도 그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밤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노트에 빼곡하게 썼다. 어느날 예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당시 전국 세븐 일레븐에는 하루 평균 1.5건의 권총 강도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다. 정 사장은 신제품 홍보물로 가득 차 있는 점포 겉유리 포스터들 중 계산대 앞의 포스트는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20달러 이상의 지폐는 받지 않는다는 공고문을 외부에 써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어느날 본사의 워런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사장이 손님으로 가장해 암행 감찰을 나왔다가 정 사장의 노트를 보게 됐다.

그 길로 정 사장의 '강도 예방법'은 미국 전역에 전파됐고 그는 6개월 만에 점장으로 다시 올라섰다. 점장 생활을 한 지 6년쯤 지나 그는 마침내 세븐 일레븐 본사의 간부가 됐다. 텍사스주 내 8개 점포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된 것. 그는 완전히 미국 생활에 적응한 것 같았다. 본인에겐 안된 얘기지만 1977년 말 자신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던 과천의 농지는 종합청사 부지로 수용돼 돌아갈 땅도 없었다.

귀국의 꿈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85년. 미국의 아이스크림 전문 브랜드인 배스킨 라빈스는 한국 진출을 앞두고 마케팅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헤드 헌터들이 정 사장을 스카우트 1순위로 정해 놓고 접촉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로 정 사장은 배스킨라빈스 파파이스 스타벅스 등의 해외 브랜드를 국내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국내 외식업계에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홀로 치밀하게 준비해 이뤄냈다. 평범한 이민자의 삶을 거부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제 세계 식품 시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진 국내 토종 기업 CJ의 최고경영자 자리였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