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으르렁거리던 '앙숙' 미국과 리비아가 다시 손을 잡았다.
지난 15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고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981년 미국이 리비아 외교관을 추방하면서 시작된 단교 조치가 최근 수년간 우호적인 양국 관계를 바탕으로 전면 정상화된 것이다.
이란과 북한의 핵갈등이 여전하고 남미에선 좌파 바람이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뉴스여서 세계 평화를 희구하는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고 있다.
○'민주주의'보다는 '우군' 필요
양국의 관계 정상화는 중동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산유국을 필요로 하는 미국과 외부에 경제를 더욱 개방하려는 리비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자연스런 결과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지가 아랍 출신의 망명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부시 정부가 '민주주의의 증진'을 최우선 목표로 강조하기보다는 이란에 맞설 연합세력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명분 외교'보다 '실리 외교'를 앞세우는 모양새다.
사실 이번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돼온 일이다.
리비아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이유로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그 해 12월 미국과 핵무기 프로그램을 자진 폐기하기로 합의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다음 해 2004년 미국은 리비아 경제제재를 대폭 완화하는 식으로 화답했다.
또 2월 트리폴리에 이익대표부를 개설한 데 이어 같은 해 6월 이를 연락사무소로 격상시켰다.
○리비아 석유도 확보
미국이 리비아와의 관계를 복원한 것은 리비아의 석유자원 때문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리비아의 석유 매장량은 총 390억배럴로 세계 9위에 올라 있다.
이란 이라크 베네수엘라 등 주요 산유국들과 정치·군사적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으로선 안전하고 투자 유망한 석유공급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석유회사들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해 달라고 강력 탄원한 것도 관계 복원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전했다.
현재 리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60만배럴에 지나지 않는다.
십수년간 계속된 미국과 유엔의 금수조치로 석유 부문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1979년 이래 하루 원유 생산량이 200만배럴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관계 회복 조치로 노후화된 리비아 내 유전들에 곧 첨단 시추장비 등이 들어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정부에 에너지 문제를 자문하는 데이비드 골드윈도 "앞으로 2~3년 안에 리비아 산유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리비아의 획기적 변신
리비아는 20여년간의 경제봉쇄 조치로 인해 국력과 경제력이 날로 쇠퇴해왔다.
미국과의 대결 구도를 계속 끌고가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 지도자는 미국의 대외 정책에 발을 맞추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WMD 포기 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경제의 개방과 외자유치,경제개발 프로젝트 추진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작년에는 40년 만에 석유채굴권 국제 입찰을 실시했으며 미국 석유회사들이 19년 만에 리비아에 재진출하게 됐다.
지난 3월에는 프랑스와 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을 맺어 프랑스의 핵기술을 농업과 의학분야에 쓸 수 있도록 지원받기로 했다.
핵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적 핵기술과 경제발전을 선택한 것이다.
1969년 27세의 나이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가 64세의 노회한 정치인이 되면서 나타난 변화라 볼 수 있다.
아무튼 리비아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한 데 대해 "상호 협상의 결과이며 상호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란 논평을 내놓았다.
○이란,북한핵은 해결될까
리비아는 지난 4월 미 국무부가 연례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이란과 북한 쿠바 시리아 수단 등과 함께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됐다.
워싱턴 주재 리비아 수석연락관인 알리 아우얄리는 리비아가 미국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은 데 대해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크게 반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 달여 만에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리비아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란과 북한을 겨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을 통해 WMD를 폐기한 리비아가 북한과 이란 같은 나라에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국의 핵프로그램과 관련,'리비아식 모델'을 따를 경우 미국은 이번 조치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 외교관계를 정식 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전 주석이 살아있었다면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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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다피 누구인가 ]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사회주의와 아랍 단일국가 건립을 목표로 내건 20세기의 대표적 '혁명가'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비슷하지만 역사적 비중에서 훨씬 카다피가 앞선다.
그는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이집트의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다.
1969년 국왕이 해외여행 나간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혁명평의회 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불과 27세의 나이였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하고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을 추방했다.
석유회사들도 국유화했다.
1972년엔 총리직에서 물러나 사회체제의 이슬람화를 추구하는 문화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또 중동지역에 단일 아랍국가를 건설해 미국 등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1972년 이집트의 사다트와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해 합의했지만 그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사다트의 평화정책에 반대해 갈라서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테러도 감행,베를린 디스코클럽 폭파사건(1986년) 미국 여객기 팬암기 폭파사건(1988년)을 일으켰다.
이처럼 혁명에 투철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친미 실용노선으로 급격하게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토론회에 화상으로 참여해서는 "중동은 후진사회이며 서구와는 달리 정부가 국민에게 가혹한 수단을 쓰고 있다"고 밝혀 변화한 세계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20세기 혁명가의 변신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5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고 수도 트리폴리에 미국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981년 미국이 리비아 외교관을 추방하면서 시작된 단교 조치가 최근 수년간 우호적인 양국 관계를 바탕으로 전면 정상화된 것이다.
이란과 북한의 핵갈등이 여전하고 남미에선 좌파 바람이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뉴스여서 세계 평화를 희구하는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고 있다.
○'민주주의'보다는 '우군' 필요
양국의 관계 정상화는 중동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산유국을 필요로 하는 미국과 외부에 경제를 더욱 개방하려는 리비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자연스런 결과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지가 아랍 출신의 망명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부시 정부가 '민주주의의 증진'을 최우선 목표로 강조하기보다는 이란에 맞설 연합세력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명분 외교'보다 '실리 외교'를 앞세우는 모양새다.
사실 이번 조치는 어느 정도 예견돼온 일이다.
리비아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이유로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그 해 12월 미국과 핵무기 프로그램을 자진 폐기하기로 합의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다음 해 2004년 미국은 리비아 경제제재를 대폭 완화하는 식으로 화답했다.
또 2월 트리폴리에 이익대표부를 개설한 데 이어 같은 해 6월 이를 연락사무소로 격상시켰다.
○리비아 석유도 확보
미국이 리비아와의 관계를 복원한 것은 리비아의 석유자원 때문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리비아의 석유 매장량은 총 390억배럴로 세계 9위에 올라 있다.
이란 이라크 베네수엘라 등 주요 산유국들과 정치·군사적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으로선 안전하고 투자 유망한 석유공급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석유회사들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해 달라고 강력 탄원한 것도 관계 복원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전했다.
현재 리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60만배럴에 지나지 않는다.
십수년간 계속된 미국과 유엔의 금수조치로 석유 부문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1979년 이래 하루 원유 생산량이 200만배럴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관계 회복 조치로 노후화된 리비아 내 유전들에 곧 첨단 시추장비 등이 들어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정부에 에너지 문제를 자문하는 데이비드 골드윈도 "앞으로 2~3년 안에 리비아 산유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리비아의 획기적 변신
리비아는 20여년간의 경제봉쇄 조치로 인해 국력과 경제력이 날로 쇠퇴해왔다.
미국과의 대결 구도를 계속 끌고가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 지도자는 미국의 대외 정책에 발을 맞추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WMD 포기 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경제의 개방과 외자유치,경제개발 프로젝트 추진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작년에는 40년 만에 석유채굴권 국제 입찰을 실시했으며 미국 석유회사들이 19년 만에 리비아에 재진출하게 됐다.
지난 3월에는 프랑스와 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을 맺어 프랑스의 핵기술을 농업과 의학분야에 쓸 수 있도록 지원받기로 했다.
핵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적 핵기술과 경제발전을 선택한 것이다.
1969년 27세의 나이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가 64세의 노회한 정치인이 되면서 나타난 변화라 볼 수 있다.
아무튼 리비아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한 데 대해 "상호 협상의 결과이며 상호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란 논평을 내놓았다.
○이란,북한핵은 해결될까
리비아는 지난 4월 미 국무부가 연례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이란과 북한 쿠바 시리아 수단 등과 함께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됐다.
워싱턴 주재 리비아 수석연락관인 알리 아우얄리는 리비아가 미국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은 데 대해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크게 반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 달여 만에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리비아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란과 북한을 겨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을 통해 WMD를 폐기한 리비아가 북한과 이란 같은 나라에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국의 핵프로그램과 관련,'리비아식 모델'을 따를 경우 미국은 이번 조치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 외교관계를 정식 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전 주석이 살아있었다면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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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다피 누구인가 ]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사회주의와 아랍 단일국가 건립을 목표로 내건 20세기의 대표적 '혁명가'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비슷하지만 역사적 비중에서 훨씬 카다피가 앞선다.
그는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이집트의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다.
1969년 국왕이 해외여행 나간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혁명평의회 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불과 27세의 나이였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하고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을 추방했다.
석유회사들도 국유화했다.
1972년엔 총리직에서 물러나 사회체제의 이슬람화를 추구하는 문화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또 중동지역에 단일 아랍국가를 건설해 미국 등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1972년 이집트의 사다트와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해 합의했지만 그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사다트의 평화정책에 반대해 갈라서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테러도 감행,베를린 디스코클럽 폭파사건(1986년) 미국 여객기 팬암기 폭파사건(1988년)을 일으켰다.
이처럼 혁명에 투철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친미 실용노선으로 급격하게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토론회에 화상으로 참여해서는 "중동은 후진사회이며 서구와는 달리 정부가 국민에게 가혹한 수단을 쓰고 있다"고 밝혀 변화한 세계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20세기 혁명가의 변신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