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경제학

시네마노믹스
(16) HER (上)
기회비용 적고 비교우위 넘치는 '모니터 속 그녀'…혁신의 확산으로 만든 'AI 연인'…조만간 나타날까
“당신과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난 아직도 어젯밤 일처럼 기억해.”

테오도르 톰블리(호아킨 피닉스 분)는 편지 대필 업체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에서 손꼽히는 실력의 대필 작가다. 이용자의 사연에 늘 자신만의 낭만적인 언어로 색채를 입힌다. 그가 모니터 앞에서 읽어내려가는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퇴근 후 홀로 맞는 세상은 잿빛이다. 가상현실(VR) 게임을 켰다가 모르는 여성에게 음성 채팅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전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함께한 추억만 잔상처럼 그를 괴롭힌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길에 한 기업의 광고 문구에 눈길을 빼앗긴다. ‘당신을 이해하고 귀기울이며 알아주는 하나의 존재’. 인공지능(AI) 운영체제(OS)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공지능이 준 삶의 ‘혁신’2014년 개봉한 영화 HER(그녀)는 부인과 별거하며 공허한 삶을 살던 테오도르가 AI 인격체인 사만다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AI는 현재보다 훨씬 진보한 존재로 그려진다. 특정 질문에 대답을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읽어내는가 하면, 축 처져 있을 때면 유머러스한 대화를 유도해 기분을 풀어준다.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점차 사랑을 느낀다.

기회비용 적고 비교우위 넘치는 '모니터 속 그녀'…혁신의 확산으로 만든 'AI 연인'…조만간 나타날까
테오도르가 삶의 활기를 되찾은 것은 엘리먼트소프트웨어라는 업체가 출시한 AI 운영체제(OS1)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이론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100여 년 전인 1911년 <경제 발전의 이론>을 통해 ‘혁신’이라는 개념을 처음 언급했다. “기업가의 혁신, 즉 생산요소의 새로운 결합이 경제 발전을 자극하는 원천”이라고 썼다. 그는 이 같은 혁신을 부르짖는 기업가 정신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봤다. <그래프>에서 보듯 기업가의 혁신에 따라 경기가 호황과 침체를 반복한다는 것이 그가 내놓은 ‘경기 순환론’이다.

슘페터는 혁신의 방식을 △새로운 재화 창출 △새 생산방식 개발 △새 시장 개척 △새 공급원(원자재) 확보 △독점적 지위 형성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기업이 얻는 초과 이윤은 이 같은 혁신의 대가라고 주장했다.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산업을 개척한 애플과 1인 미디어 시대를 연 유튜브가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것도 슘페터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다.

영화 속 엘리먼트소프트웨어도 새로운 재화(AI OS)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뤘다. 테오도르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AI가 어느 정도 보편화돼 있다. 그는 사만다를 만나기 전에도 AI로 하루를 관리했다. 무선 이어폰으로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삭제’ ‘다음에 하기’ 등 한 단어만 말하면 명령이 자동으로 실행됐다. 엘리먼트소프트웨어의 AI는 한 차원을 더 뛰어넘었다. 명령어에만 수동적으로 응답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읽고 한발 앞서 행동했다. 기존 AI에 없던 감성과 직감을 갖고 스스로 판단도 내렸다. 테오도르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새 AI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혁신이 확산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보여 준다. 기회비용 줄인 AI와의 만남사만다를 만난 뒤 테오도르의 삶은 180도 바뀐다. 그녀는 인간이 대체할 수 없는 수준의 업무 비서 역할을 한다. 몇 년을 묵혀 놨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파일과 연락처를 눈 깜짝할 새 분류해 정리한다. 인간이 선택의 순간마다 느끼는 망설임도 거의 없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하지 못하거나 미뤄놨던 일들을 사만다에게 믿고 맡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본인의 일을 맡기는 것은 ‘기회비용’을 고려한 ‘비교우위’ 때문이다. 기회비용은 어떤 경제적 선택을 할 때 이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비용이다. 경제학에서는 더 적은 기회비용으로 다른 생산자와 같은 양의 재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비교우위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는 경제적 주체들이 ‘거래’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된다.

테오도르가 직접 메일을 분류하고 스케줄을 적어 관리하려면 장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업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기회비용으로 날리는 셈이다. 이에 비해 AI인 사만다에게는 찰나의 일이다. 사만다가 비교우위를 가진 업무는 그녀에게 맡기고, 본인은 그 시간에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의뢰인들이 테오도르에게 편지 대필을 맡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문장을 쓰는데도 끙끙 앓는 사람이라면 대필은 좋은 선택지다. 편지를 쓸 능력이 있지만 다른 사업으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람 역시 대필을 맡기고 그 시간에 사업에 집중하는 게 낫다.

그가 사만다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기회비용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인간은 경제적 선택을 할 때 기회비용이 적은 쪽을 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과 함께했을 때의 기회비용(잦은 다툼으로 인한 감정적 소모)이 사만다와의 만남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사만다를 택함으로써 또 다른 기회비용(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이 생긴다. 캐서린과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에 지쳐 있던 테오도르로서는 후자가 더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정소람 한국경제신문 기자 ram@hankyung.com NIE 포인트① 슘페터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창조적 파괴’와 ‘기업가 정신’을 꼽은 이유는 무엇 때문까.

② 개인과 기업 등 경제주체가 다른 경제행위자보다 모두 절대우위에 있음에도 기회비용이 더 적은 비교우위의 생산에 집중하는 이유는 왜일까.

③ 데이터를 인지하고 연산 처리하는 능력에서 이미 인간을 앞지르고 있는 인공지능(AI)이 사랑 등 감정과 인간 고유의 특성인 창의성까지 갖출 정도로 발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