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글로벌 석유전쟁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주요 산유국 관료들이 지난 9일 이란 테헤란에서 긴급 화상회의를 열어 원유 감산을 협의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주요 산유국 관료들이 지난 9일 이란 테헤란에서 긴급 화상회의를 열어 원유 감산을 협의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국제 유가가 폭락하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배럴당 60달러대에 팔렸지만 이달 들어선 미국 유가 기준으로 통하는 서부텍사스원유(WTI) 시장에서 ‘마이너스 거래’까지 나왔다. 마이너스 거래는 원유를 파는 쪽이 아니라 사가는 쪽이 돈을 받는 거래다. 사가는 쪽이 재고를 치워주는 대가를 받는 것이다. 세계 원유시장에서 주요 유종이 마이너스로 거래된 것은 사상 최초다.

이는 원유시장에서 전례 없는 수요 충격과 공급 충격이 겹쳐 일어난 결과다. 수요 충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촉발했다. 코로나19로 세계 원유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공급 충격은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의 원유시장 주도권 경쟁 때문에 발생했다. 이들 산유국은 원유 가격이 약세를 보이는 와중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지난달 초 돌연 ‘석유전쟁’에 나섰다. 코로나19로 수요가 줄었지만 각자 석유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양국은 이후 소폭 감산에만 합의하고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복잡한 사정이 얽힌 석유전쟁

원유 수요 줄고 '석유왕' 치킨게임…끝 모를 석유전쟁
여기엔 각국의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일단 사우디는 현금이 필요하다.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국가개혁 프로젝트인 ‘비전 2030’을 지휘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초대형 개발사업을 여럿 추진 중이다. 사우디 사막 한복판에 서울의 43.8배 규모(약 2만6500㎢)로 사우디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조성하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사우디가 이런 대규모 사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은 원유 수출뿐이다. 사우디가 원유시장 우위를 확실히 점한 뒤 가격을 움직이려 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빈 살만 왕세자가 올해 왕위에 오르겠다는 야욕을 드러내 유가전쟁 시점이 확 당겨졌다는 분석이 많다.

러시아도 에너지시장에서 발을 넓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 연방정부 세입의 절반이 가스와 원유 수출을 통해 나와서다. 그러나 그간 미국과 에너지시장을 놓고 으르렁거리다 여러 사업이 좌초됐다. 미국은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까봐 경제 제재 등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작년 말 미국이 러시아의 가스관 건설사업에 참여한 기업을 제재한다고 발표해 공사 기업들이 발을 빼도록 함으로써 사업을 중단시켰던 것이 좋은 예다.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실상 종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자국 내에서 다시 집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경제 성장이 필수다.

미국 셰일업계는 ‘줄파산’ 긴장

석유전쟁의 불똥은 미국 에너지업계로 튀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 셰일오일업계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미국이 개발을 주도한 셰일오일은 그간 원유 대체재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셰일은 생산가격이 원유보다 훨씬 비싸다. 유가가 50~60달러 하던 시절엔 셰일의 채산성도 좋았지만 이젠 생산비용이 판매비용을 웃돌 지경이다.

이미 미국의 영세 셰일기업 일부는 유가 폭락세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휘팅페트롤리엄은 이달 초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대형 업체 주가 폭락세도 뚜렷하다. 셰일업체 옥시덴탈페트롤리엄의 주가는 연초 대비 약 70%나 깎였다.

미국 에너지업계는 사우디와 러시아처럼 원유 감산 합의를 통해 생산량을 전격 줄일 수도 없다. 미국 정부가 반독점법을 통해 카르텔 움직임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미국엔 전국 에너지 공급 향방을 결정하는 당국이 없다. 각 기업은 일단 현금흐름을 창출하기 위해 스스로 생산량을 줄이지 못하고 남들이 감산에 나서주기를 바라며 눈치만 보는 분위기다.

당분간 사태 장기화 예상

전문가들은 이번 석유전쟁 사태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는 감산엔 합의했지만 대신 중국 등 아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원유 가격을 확 내려 점유율 경쟁에 나섰다. 러시아도 중국과 이란 등에 석유 수출량을 늘리려 애쓰고 있다.

수요 회복도 요원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달 원유 수요 감소폭이 하루 2900만 배럴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작년 세계 하루 석유 수요량(약 1억 배럴)의 29%다. IEA는 “어떤 감산 합의로도 이 정도 수요 손실을 상쇄할 수는 없다”고 분석했다.

선한결 한국경제신문 기자 always@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생산자가 손실을 보면서도 제품 가격을 계속 낮추며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② 2008년 수요 감소, 2014년 공급 과잉에 따른 유가 하락과 이번 유가 하락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③ 세계 에너지 시장의 패권을 쥐려는 미국 러시아 중동 산유국 가운데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