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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전상국 《동행》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어릴 때 공포영화가 무서웠다. 뱀파이어와 좀비와 악령과 심령술사가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의 세계. 나이를 먹으면서 진정한 삶의 공포는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드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삶은 행복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믿음과 신화가 배반당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얄팍한 편법이 우직한 정공법을 이기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응원하던 사랑이 외풍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 존경했던 사람이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혈육의 정조차 절대가 아님을 신문 사회면에서 확인하는 순간. 이런 순간들을 겪고 나면 더 이상 해맑은 얼굴로 깔깔대며 살기는 힘들어진다. 청소년들이여, 어른들의 얼굴이 찌들어 버린 것은 이런 연유다.우리의 역사에는 한 차원 더 깊은 공포가 있다. 작은 시골 마을의 공동체. 어제까지 한 우물의 물을 마시고 잔칫상의 고깃점을 나눠 먹던 이웃이 오늘 갑자기 서로를 죽인다. 피는 피를 부르고 원수가 된 자들이 복수의 참극을 벌인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비극이니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삶은 계속되어 선조 때부터 지켜온 공동체는 지속되고 구성원들은 비장한 이별도 야멸찬 절연도 없이 여전히 부대끼며 살아간다. 살육의 기억을 잊었을 리 만무하건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지어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내가 없는 동안 내 아버지의 무덤을 관리한다. 징그러운 삶의 관성.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런데 이런 지옥이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것이 우리 현대사이고 그 비극의 정점에 6·25전쟁이 있다. 전상국의 ‘동행’은 전쟁이 빚어낸 이러한 비극을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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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 《복덕방》

    복덕방과 세 노인서울의 한 복덕방에서 세 노인이 소일한다. 복덕방 주인인 서 참의는 구한말 훈련원 참의로 봉직하였으나 군대 해산 후 복덕방을 차린다. 화려한 무관 시절을 돌아보면 서글프기도 하지만 가옥 중개업으로 차차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자 낙천적인 그는 그럭저럭 현실에 만족하게 된다. 안 초시는 형편도 성격도 서 참의와 대조적이다. 그는 사업에 거듭 실패하여 생활의 기반을 모두 잃었으며 말끝마다 ‘젠장’ 아니면 ‘흥!’하는 콧웃음을 붙이며 불만족으로 점철된 일상을 산다. 서 참의의 훈련원 시절 친구인 박희완 영감은 온화한 성품으로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에 의지하여 대서업을 하겠다며 복덕방에서도 열심히 일어 공부를 한다. 안 초시는 더 늙기 전에 재기하여 다시 세상과 교섭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던 그는 박희완 영감이 알려 준 정보를 믿고 딸을 부추겨 부동산에 투자한다. 신항구 건설 계획을 미리 입수하여 땅을 산 것이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도 항구는 건설되지 않고 땅값은 전혀 오르지 않는다. 박희완에게 정보를 준 사람이 자신이 산 땅을 처분하기 위해 사기극을 벌인 것이었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안 초시는 음독자살하고 만다.이 서사의 이면에는 노년의 나이도 비껴가지 않는 강한 욕망이 도저히 흐르고 있으며 그 욕망의 대상은 바로 돈이다. 작품 시작 부분에서 안 초시는 몽상을 하는데 몽상의 소재는 돈이며 몽상의 내용은 단 천 원을 들여 땅을 사서 일만 구천 원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런 욕망은 결국 부동산 투기로 이어지고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데 그 욕망은 그의 것만은 아니다. 성공한 무용수 안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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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길 《제3인간형》

    생활고로 멀어진 작가의 삶6·25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을 온 석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교편을 잡는다. 그는 원래 신문사에 근무하며 글을 쓰던 작가였으나 전쟁통의 문단 환경은 몹시 열악하다. 정치적 운동에 흥미가 없는 석은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정치 선전선동의 광풍에 몸을 던지기 싫었고 무엇보다 처자식을 위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소소한 글을 팔지 않고 창작에 골몰할 수 있을 거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잡무가 끊이지 않았고 스물네 시간 온 신경을 아이들에게 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훌륭한 교육자가 되면 어떨까? 그러나 교육자로서 석은 아직 애송이였다. 그리고 긴 세월 삶의 목표였던 작가의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생활에 우울감을 느낄 무렵 문단의 옛 벗 조운이 찾아온다.이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삶의 여정을 걷는 세 인물을 조명하고 있다. 그중 외면적으로 화려한 삶의 전환을 꾀한 사람은 조운이다. 작가 조운은 독특한 철학적 명제를 난해한 문장에 담는 개성 뚜렷한 존재였다. 자의식 가득한 작품 세계를 고집하였고 생활을 위해 매문하지 않았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문학적 결벽성을 유지하는 그는 문단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문단과 발을 끊은 지 3년 만에 석을 찾아온 것이다. 무성한 소문대로 그는 사업가로 대성해 있었다. 피난 온 부산에서 운수업에 손을 대어 큰 부를 축적하였다. 돈 버는 재미는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무얼 생각하고, 값싼 담배를 하루에 오십여 대씩이나 연달아 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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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역사》

    익숙하지 않은 양옥집 삶창신동 판잣집에 살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깨끗한 양옥으로 하숙을 옮기게 된다. 신문지로 바른 벽에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라는 낙서가 적혀 있고 천장의 도배지가 축 늘어져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예전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 쾌적하고 위생적인 양옥집. 그러나 ‘나’는 좀처럼 새 집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집의 식구는 주인 영감 부부, 대학강사인 아들과 며느리, 여고생인 딸, 아들 부부의 어린 딸, 그리고 식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 식구들의 생활은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여섯 시 기상, 아침 식사 후 출근 또는 등교, 오전 열 시경 주인 노파와 며느리의 미싱 돌리기, 오후 네 시 며느리의 피아노 연주가 차례대로 진행된다.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모든 식구가 귀가. 식사 후 잡담을 하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공부. 열 시쯤 대청에 나와 물 한 컵씩 마시고 인사하고 잠드는 일과.‘나’는 이런 생활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빈틈없는 규칙성에 점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떠나온 창신동을 자꾸 떠올린다. 창신동 집은 형편없이 작았는데 겨우 한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꽉 차버리는 작은 방이 다섯이나 되었다. 주인 식구, 영자라는 창녀, 절름발이 사내 부녀, 사십대 막벌이 노동자 서씨, 그리고 ‘나’가 그 방들을 하나씩 차지하였다. 영자는 ‘나’에게 유명 성명철학관에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급전도 빌려주는 등 맘씨 좋은 여성이다. 절름발이 사내는 교육을 한답시고 매일 밤 어린 딸에게 매섭게 매질을 하는데 딸이 몹시 앓자 안절부절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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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희《너무 한낮의 연애》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좋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하고 살아. 어떻게 된 게 하루에 이천원으로 하루를 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거 다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양희와의 재회대기업 영업팀장 필용은 시설관리 담당자로 좌천된다. 점심 시간이 되면 필용은 이십 분을 걸어 맥도날드로 식사를 하러 간다.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던 그는 맞은편 건물의 현수막에서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연극 제목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자신이 뭣 때문에 여기 와서 점심을 먹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양희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다.양희는 필용의 대학 과 후배. 16년 전 대학 시절 필용은 종로의 어학원에서 우연히 양희와 같은 강의를 듣고 맥도날드에서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도서관에 가는 생활을 반복한다. 필용은 양희와의 대화가 즐거웠는데 그것은 양희가 필용의 허황된 거짓말과 과시를 묵묵히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비쩍 마르고 재미없는 희곡을 끊임없이 쓰던, 필용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던 양희가 어느 날 사랑의 고백을 한다.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고저 없는 톤으로,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느닷없고 맥락 없고 설레는 조짐도 없었건만 고백은 고백이었고 필용은 다음 날부터 매일 한낮에 양희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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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 《따라지》

    쓸 방을 못 쓰고 사글세를 논 것은 돈이 아쉬웠던 까닭이었다. 두 영감 마누라가 산다고 호젓해서 동무로 모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팔자가 사나운지 모두 우거지상, 노랑퉁이, 말괄량이, 이런 몹쓸 것들뿐이다. 이 망할 것들이 방세를 내는 셈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주 안 내는 것도 아니다. 한 달 치를 비록 석 달에 별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역 내는 건 내는 거였다.사직골 꼭대기 집에서사직골 꼭대기 깨웃한 초가집 주인마누라는 오늘도 골이 난다. 사글세를 못 받아서다.세를 준 방은 세 개다. 첫 번째 방에는 대낮에도 이불을 뒤쓰고 잠을 자는 젊은 녀석이 있다. 제복공장 직공인 과부 누나에게 얹혀살며 방세 독촉을 할 때마다 묵묵부답이다가 돈은 우리 누님이 쓰는데요 누님 나오거든 말씀하십시오, 할 뿐이다. 두 번째 방에는 뒷간에 피똥을 싸 대는 부족증 환자 영감과 버스 걸 노릇으로 밥을 버는 딸이 살고 있다. 애초 방을 얻을 때 병을 숨긴 게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영감의 광대가 불거진 노란 낯짝을 볼 때마다 송장 칠까 애간장이 졸아든다. 세 번째 방에는 카페 여급 아키코와 영애가 산다. 영애는 심술은 낼망정 뭐라 물으면 대답이나 하건만 아키코는 입을 앙다물고 대꾸 한마디가 없다. 방세를 조르면 외려 성을 낸다. 누구 있구두 안 내요? 좀 편히 계셔요, 어련히 낼라구 그런 극성 첨 보겠네.방세고 뭐고 이 인간들을 아무래도 쫓아내야지 싶은 주인마누라는 꾀를 내어 집안의 조카를 데려왔다. 우선은 제일 만만한 백수, 방구석에서 맨날 글을 쓰는 걸 보고 아키코가 지어 준 별명대로라면 톨스토이를 쫓아내기로 한다. 주인마누라의 지시를 받은 조카는 톨스토이의 방에서 세간을 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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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치숙》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1]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두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 내 원!”고모를 내쫓은 사회주의자 고모부일본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나’에게는 아저씨, 정확하게는 오촌 고모부가 한 명 있다. 이 아저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고학력자이지만 사는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는 착한 아주머니(고모)를 소박 맞히고 신교육을 받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아주머니네에 의탁했던 은혜를 입은 ‘나’는 명절 때면 고깃근을 사 보내는 등 아주머니를 돕는다. 고생하는 아주머니가 딱해 여러 차례 개가도 권하였으나 아주머니는 숭헌 소리 말라며 듣질 않는다. 폐병으로 육신이 무너진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오자 아주머니는 식모살이에 삯바느질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지극정성으로 그를 보살핀다. 물론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는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올 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아주머니의 병구완으로 아저씨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돌보거나 아주머니를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도저히 못 끊으니 아편하고 꼭 같은 게 사회주의인가. ‘사람이란 것은 제가끔 분지복이 있어서 기수를 잘 타고나든지 부지런하면 부자가 되는 법이요, 복록을 못 타고나든지 게으른 놈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요, 다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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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진 《자전거 도둑》

    “쯔쯧, 이녁도 함경도 아바이 출신이믄 부랄값도 못하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드러케 다루는지는 알 만하잖소? 그걸 왜 내게 묻소 으응? 아 안 그렇소? 야! 간나야,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어서 말 좀 해보라우. 짐짓 호령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허공 높이 허우적거렸다. 길티……기게 바로 진짜 교육이야.‘나’는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자꾸 몰래 타는 범인이 바로 아파트 위층에 사는 에어로빅 강사 미혜임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볼 때마다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 브루노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나’는 ‘자전거 도둑’ 미혜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물품 도매상 혹부리 영감 앞에서 소주 두 병 때문에 어린 ‘나’를 때리는 연극을 감행했었다. 혹부리 영감에게 원한을 품은 ‘나’는 하수도를 통해 영감의 가게에 침입해 분탕질을 쳐 상품을 몽땅 판매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똥까지 싸놓는다. 충격받은 영감은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어두운 기억은 미혜에게도 있다. ‘나’의 집에 초대받아 와서 함께 <자전거 도둑>을 본 미혜는 주인공의 자전거를 훔쳤다가 들키자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청년이 어릴 때 죽은 오빠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혜는 간질 환자 오빠를 홀로 집에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어린 ‘나’와 미혜는 간접살인을 한 셈이다. 둘은 함께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누지만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이후 미혜는 더 이상 ‘나’의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이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