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27)] 김승옥 《역사》
익숙하지 않은 양옥집 삶

창신동 판잣집에 살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깨끗한 양옥으로 하숙을 옮기게 된다. 신문지로 바른 벽에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라는 낙서가 적혀 있고 천장의 도배지가 축 늘어져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예전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 쾌적하고 위생적인 양옥집. 그러나 ‘나’는 좀처럼 새 집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집의 식구는 주인 영감 부부, 대학강사인 아들과 며느리, 여고생인 딸, 아들 부부의 어린 딸, 그리고 식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 식구들의 생활은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여섯 시 기상, 아침 식사 후 출근 또는 등교, 오전 열 시경 주인 노파와 며느리의 미싱 돌리기, 오후 네 시 며느리의 피아노 연주가 차례대로 진행된다.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모든 식구가 귀가. 식사 후 잡담을 하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공부. 열 시쯤 대청에 나와 물 한 컵씩 마시고 인사하고 잠드는 일과.

‘나’는 이런 생활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빈틈없는 규칙성에 점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떠나온 창신동을 자꾸 떠올린다. 창신동 집은 형편없이 작았는데 겨우 한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꽉 차버리는 작은 방이 다섯이나 되었다. 주인 식구, 영자라는 창녀, 절름발이 사내 부녀, 사십대 막벌이 노동자 서씨, 그리고 ‘나’가 그 방들을 하나씩 차지하였다. 영자는 ‘나’에게 유명 성명철학관에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급전도 빌려주는 등 맘씨 좋은 여성이다. 절름발이 사내는 교육을 한답시고 매일 밤 어린 딸에게 매섭게 매질을 하는데 딸이 몹시 앓자 안절부절못하는 것으로 보아 영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 집을 생각할 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람은 역시 노동자 서씨이다.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27)] 김승옥 《역사》
원시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현대

젊은 ‘나’와 격의 없는 술친구였던 서씨는 어느 밤 나를 깨워 동대문으로 간다. 동대문은 집채만 한 축대 뒤에 세워져 있고 커다란 돌이 쌓여 이루어진 성벽이 건물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는 마치 곡예단의 원숭이처럼 민첩한 솜씨로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성벽을 이루고 있는 금고만 한 돌덩이를 한 손에 하나씩 집어서 번쩍 들어올렸다. ‘나’는 감탄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씨는 역사(力士)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중국에서 이름 있는 역사였고 그 힘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영광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서씨는 그렇지 못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원시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무형의 가보가 공사장에서 겨우 보수를 좀 더 받는 기능밖에 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서씨는 그 보수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밤중 동대문의 성곽에서 명부의 조상들에게 선조의 영광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나’가 고급스러운 양옥집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고 판잣집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서씨 같은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즉, ‘나’가 그리워한 것은 판잣집의 불결함과 비능률성 자체라기보다는 그 집에서 생동하던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서씨는 원초적인 힘을 가졌고 그리고 그 힘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 자유롭게 선택하였다. 양옥집은 완전히 그 대척점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하루를 엄격하게 구획하는 근대적 시간 개념이 만들어낸 규율은 자못 폭력적이며 ‘나’는 양옥집의 폭력성에 고통받는다.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27)] 김승옥 《역사》
그러면 ‘나’는 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양옥집을 박차고 나와 창신동으로 돌아갈 것인가? 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가 한 일은 약국에서 흥분제를 사서 잠들기 전 식구들이 마시는 물에 몰래 탄 것이었다. 이 집 식구들이 한번쯤은 기계적인 규칙에서 이탈하기를 바랐고 잠 못 이룬 그들이 불을 켜고 대청마루로 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피아노 건반을 광폭하게 두드린다. 나오시오, 제발 나오시오들. 그 빈껍데기에 불과한 규율 따위 집어던져 보시오. ‘나’는 이런 행위에는 산업화·도시화·기계화로 대변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그 집을 뛰쳐나오지 않은 것은 판잣집의 생명력이라는 것이 조만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전근대의 흔적으로만 남을 것임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27)] 김승옥 《역사》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작품
"액자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죠"


소설 ‘무진기행’으로 더 알려진 김승옥의 이 단편은 외화 속에 내화가 들어 있는 액자 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은 내화이다. 그리고 이 내화는 외화의 ‘나’가 어느 공원에서 우연히 한 젊은이에게 전해들은 경험담이다. 이 젊은이가 내화 속의 ‘나’이다. 젊은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 뒤 “내가 틀려 있었을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아무도 틀려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 젊은이가 보았다는 두 가지 생활이 사실 내 바로 곁에 공존하고 있다면 나도 좀 멍청해져 버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멍청해져 버리다.’ 즐겁게 긍정할 수 없지만 준수할 수밖에 없는 산업사회의 질서. 현대 문명에 포섭되어 있되 마음속에 역사 한 명을 품고 있는 현대인의 모순된 심경을 ‘나’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