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문학이야기 (23)] 김소진 《자전거 도둑》
“쯔쯧, 이녁도 함경도 아바이 출신이믄 부랄값도 못하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드러케 다루는지는 알 만하잖소? 그걸 왜 내게 묻소 으응? 아 안 그렇소? 야! 간나야,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어서 말 좀 해보라우. 짐짓 호령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허공 높이 허우적거렸다. 길티……기게 바로 진짜 교육이야.

‘나’는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자꾸 몰래 타는 범인이 바로 아파트 위층에 사는 에어로빅 강사 미혜임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볼 때마다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 브루노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나’는 ‘자전거 도둑’ 미혜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물품 도매상 혹부리 영감 앞에서 소주 두 병 때문에 어린 ‘나’를 때리는 연극을 감행했었다. 혹부리 영감에게 원한을 품은 ‘나’는 하수도를 통해 영감의 가게에 침입해 분탕질을 쳐 상품을 몽땅 판매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똥까지 싸놓는다. 충격받은 영감은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문학이야기 (23)] 김소진 《자전거 도둑》
어두운 기억은 미혜에게도 있다. ‘나’의 집에 초대받아 와서 함께 <자전거 도둑>을 본 미혜는 주인공의 자전거를 훔쳤다가 들키자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청년이 어릴 때 죽은 오빠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혜는 간질 환자 오빠를 홀로 집에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어린 ‘나’와 미혜는 간접살인을 한 셈이다. 둘은 함께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누지만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이후 미혜는 더 이상 ‘나’의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의 시선을 강렬히 붙드는 부분은 단연 아버지가 혹부리 영감의 구멍가게에서 ‘나’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동향 출신이라는 인연에 의지해 타 도매상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떼어다가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 입장에서 혹부리 영감은 최고 상전이다. 아버지가 물건 자루에 소주 두 병을 몰래 더 넣었다가 발각되자 ‘나’는 자신의 실수라고 임기응변하고 혹부리 영감은 아버지에게 ‘나’를 몹시 쳐서 제대로 훈육하라고 명한다. 아버지는 굽신거리며 ‘나’의 ‘뺨을 기세 좋게 올려붙였다. 그 순간 ‘나’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눈 속에 흐르지도 못하고 괴어 있는 눈물을’ 투시한다. 금쪽같은 아들의 뺨을 후려치길 강제 당한 애비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문학이야기 (23)] 김소진 《자전거 도둑》
독자들은 가난에 찢긴 눈물겨운 부정에 연민을 느낀다. 그런 애비를 목도하는 어린 아들은 어땠을까. ‘나’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라는 ‘끔찍한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그 순간을 회상한다.

흔히 유년기는 티 없는 동심의 시절로 미화되지만 사실 많은 이에게 유년은 어둡고 깊은 우물이다. 어떤 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선뜻 꺼내기 어려운 기억을 그 우물 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의 우물에는 혹부리 영감의 가게를 결딴내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기억이 숨어 있다.

미혜의 우물에는 소년 시절에 생을 마감한 오빠가 묻혀 있다. 간질병으로 다락에 갇힌 오빠, 자신의 속살을 보고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혐오스러운 오빠. 어머니가 친척집에 간 사이 친구 집으로 도망가서 다락에 갇힌 오빠를 굶겨 죽음으로 몰고 간 미혜는 커서 남의 자전거를 훔쳐 타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 속, 오빠를 닮은 청년을 떠올리며 자전거를 타는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기억에 스스로를 고착시키면서 자신을 벌하는 것일까? 둘은 가족관계 속에서 상처받았고 복수하였으되 복수의 과도함으로 스스로를 위해하였다. 어린 그들은 복수의 끝과 파장을 가늠할 수 없었고 상처는 성장과 더불어 커졌으며 타인과 공유하기에는 너무 깊어졌다.

<자전거도둑>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1948년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빈곤한 이탈리아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 중 하나다. 도둑맞은 자전거를 벌충하기 위해 역시 자전거를 훔치다가 체포돼 어린 아들의 면전에서 망신 당한 아버지. 허름한 아버지와 무구한 아들이 터덜터덜 석양 속을 걷는 뒷모습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가 거기서 끝났기에 브루노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고 함경도 아바이 혹부리 영감의 ‘수도상회’에서 ‘자전거도둑 시즌2’를 ‘찍는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이 아니라 가혹한 ‘누아르필름’이다. ‘나’가 수도상회를 망가뜨리는 장면, 그 생생하게 스릴 넘치며 무시무시한 정경을 떠올려 보라. 미혜의 ‘누아르필름’도 비정함의 순도가 어지러울 정도로 높다.

[문학이야기 (23)] 김소진 《자전거 도둑》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지 못하고 외면하며 처음보다도 먼 타인이 된 것은 상대의 가혹함을 통해 스스로의 가혹함을 직시하는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따뜻한 관계를 맺는다는 믿음은 신화(myth)에 불과한 것일까. 적절한 거리 속에 용인할 수 있는 유년의 상처란 어디까지일까. 헤집어진 상처가 흐릿한 상흔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이들은 어떤 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