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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한 시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이다. 어떤 문학 작품은 하나의 문장만으로도 기억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이는 독자에게 각인된 빼어난 문장에 대한 상찬일 수도 있고 문장이 주제 의식을 앞선다는 혹평일 수도 있다. 이 단편은 어느 쪽일까?‘나’는 숙희라는 이름의 여고생. 시골 외할아버지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오래전 아버지를 여읜 엄마는 아직 젊고 아름답다. 어느 날 므슈 리가 외할아버지 과수원으로 찾아오고 엄마는 그와 결혼한다. ‘나’ 역시 서울 S촌 므슈 리의 집에 살게 된다. ‘나’는 그림자 같은 생활을 하던 엄마가 행복해진 것 같아서 흡족하다. 대범한 성격의 호인인 새아버지도 좋고 S촌의 숲속 환경도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벽돌집도 기분에 맞다. 그러나 이곳에는 뜻하지 않은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진원은 므슈 리의 아들 현규다. 현규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수재이며 ‘나’의 학교 테니스 코치보다 운동 실력이 뛰어나며 아폴로의 그것처럼 모양 좋은 머리통을 가졌다. ‘나’는 어느새 현규를 사랑하게 됐고 그것은 그를 오빠라고 부를 수 없게 하는 감정이다. 그를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지만 그것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다. 현규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에는 죄의식이 없지만 그것은 엄마와 므슈 리를 배반하는 것이고 이는 곧 네 사람 전부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파멸이라는 말의 캄캄하고 무서운 음향 앞에서 떤다.이 단편을 처음 안 것은 여중 시절 벗을 통해서다. 벗은 이 소설을 열성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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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길 《제3인간형》

    생활고로 멀어진 작가의 삶6·25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을 온 석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교편을 잡는다. 그는 원래 신문사에 근무하며 글을 쓰던 작가였으나 전쟁통의 문단 환경은 몹시 열악하다. 정치적 운동에 흥미가 없는 석은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정치 선전선동의 광풍에 몸을 던지기 싫었고 무엇보다 처자식을 위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소소한 글을 팔지 않고 창작에 골몰할 수 있을 거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잡무가 끊이지 않았고 스물네 시간 온 신경을 아이들에게 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훌륭한 교육자가 되면 어떨까? 그러나 교육자로서 석은 아직 애송이였다. 그리고 긴 세월 삶의 목표였던 작가의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생활에 우울감을 느낄 무렵 문단의 옛 벗 조운이 찾아온다.이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삶의 여정을 걷는 세 인물을 조명하고 있다. 그중 외면적으로 화려한 삶의 전환을 꾀한 사람은 조운이다. 작가 조운은 독특한 철학적 명제를 난해한 문장에 담는 개성 뚜렷한 존재였다. 자의식 가득한 작품 세계를 고집하였고 생활을 위해 매문하지 않았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문학적 결벽성을 유지하는 그는 문단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문단과 발을 끊은 지 3년 만에 석을 찾아온 것이다. 무성한 소문대로 그는 사업가로 대성해 있었다. 피난 온 부산에서 운수업에 손을 대어 큰 부를 축적하였다. 돈 버는 재미는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무얼 생각하고, 값싼 담배를 하루에 오십여 대씩이나 연달아 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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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옥 《역사》

    익숙하지 않은 양옥집 삶창신동 판잣집에 살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깨끗한 양옥으로 하숙을 옮기게 된다. 신문지로 바른 벽에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라는 낙서가 적혀 있고 천장의 도배지가 축 늘어져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예전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 쾌적하고 위생적인 양옥집. 그러나 ‘나’는 좀처럼 새 집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집의 식구는 주인 영감 부부, 대학강사인 아들과 며느리, 여고생인 딸, 아들 부부의 어린 딸, 그리고 식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 식구들의 생활은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여섯 시 기상, 아침 식사 후 출근 또는 등교, 오전 열 시경 주인 노파와 며느리의 미싱 돌리기, 오후 네 시 며느리의 피아노 연주가 차례대로 진행된다. 오후 여섯 시 반까지는 모든 식구가 귀가. 식사 후 잡담을 하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공부. 열 시쯤 대청에 나와 물 한 컵씩 마시고 인사하고 잠드는 일과.‘나’는 이런 생활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빈틈없는 규칙성에 점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떠나온 창신동을 자꾸 떠올린다. 창신동 집은 형편없이 작았는데 겨우 한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꽉 차버리는 작은 방이 다섯이나 되었다. 주인 식구, 영자라는 창녀, 절름발이 사내 부녀, 사십대 막벌이 노동자 서씨, 그리고 ‘나’가 그 방들을 하나씩 차지하였다. 영자는 ‘나’에게 유명 성명철학관에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급전도 빌려주는 등 맘씨 좋은 여성이다. 절름발이 사내는 교육을 한답시고 매일 밤 어린 딸에게 매섭게 매질을 하는데 딸이 몹시 앓자 안절부절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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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희《너무 한낮의 연애》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좋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하고 살아. 어떻게 된 게 하루에 이천원으로 하루를 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거 다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양희와의 재회대기업 영업팀장 필용은 시설관리 담당자로 좌천된다. 점심 시간이 되면 필용은 이십 분을 걸어 맥도날드로 식사를 하러 간다.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던 그는 맞은편 건물의 현수막에서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연극 제목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자신이 뭣 때문에 여기 와서 점심을 먹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양희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다.양희는 필용의 대학 과 후배. 16년 전 대학 시절 필용은 종로의 어학원에서 우연히 양희와 같은 강의를 듣고 맥도날드에서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도서관에 가는 생활을 반복한다. 필용은 양희와의 대화가 즐거웠는데 그것은 양희가 필용의 허황된 거짓말과 과시를 묵묵히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비쩍 마르고 재미없는 희곡을 끊임없이 쓰던, 필용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던 양희가 어느 날 사랑의 고백을 한다.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고저 없는 톤으로,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느닷없고 맥락 없고 설레는 조짐도 없었건만 고백은 고백이었고 필용은 다음 날부터 매일 한낮에 양희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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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 《따라지》

    쓸 방을 못 쓰고 사글세를 논 것은 돈이 아쉬웠던 까닭이었다. 두 영감 마누라가 산다고 호젓해서 동무로 모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팔자가 사나운지 모두 우거지상, 노랑퉁이, 말괄량이, 이런 몹쓸 것들뿐이다. 이 망할 것들이 방세를 내는 셈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주 안 내는 것도 아니다. 한 달 치를 비록 석 달에 별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역 내는 건 내는 거였다.사직골 꼭대기 집에서사직골 꼭대기 깨웃한 초가집 주인마누라는 오늘도 골이 난다. 사글세를 못 받아서다.세를 준 방은 세 개다. 첫 번째 방에는 대낮에도 이불을 뒤쓰고 잠을 자는 젊은 녀석이 있다. 제복공장 직공인 과부 누나에게 얹혀살며 방세 독촉을 할 때마다 묵묵부답이다가 돈은 우리 누님이 쓰는데요 누님 나오거든 말씀하십시오, 할 뿐이다. 두 번째 방에는 뒷간에 피똥을 싸 대는 부족증 환자 영감과 버스 걸 노릇으로 밥을 버는 딸이 살고 있다. 애초 방을 얻을 때 병을 숨긴 게 괘씸하기도 하거니와 영감의 광대가 불거진 노란 낯짝을 볼 때마다 송장 칠까 애간장이 졸아든다. 세 번째 방에는 카페 여급 아키코와 영애가 산다. 영애는 심술은 낼망정 뭐라 물으면 대답이나 하건만 아키코는 입을 앙다물고 대꾸 한마디가 없다. 방세를 조르면 외려 성을 낸다. 누구 있구두 안 내요? 좀 편히 계셔요, 어련히 낼라구 그런 극성 첨 보겠네.방세고 뭐고 이 인간들을 아무래도 쫓아내야지 싶은 주인마누라는 꾀를 내어 집안의 조카를 데려왔다. 우선은 제일 만만한 백수, 방구석에서 맨날 글을 쓰는 걸 보고 아키코가 지어 준 별명대로라면 톨스토이를 쫓아내기로 한다. 주인마누라의 지시를 받은 조카는 톨스토이의 방에서 세간을 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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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치숙》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1]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두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 내 원!”고모를 내쫓은 사회주의자 고모부일본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나’에게는 아저씨, 정확하게는 오촌 고모부가 한 명 있다. 이 아저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고학력자이지만 사는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는 착한 아주머니(고모)를 소박 맞히고 신교육을 받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아주머니네에 의탁했던 은혜를 입은 ‘나’는 명절 때면 고깃근을 사 보내는 등 아주머니를 돕는다. 고생하는 아주머니가 딱해 여러 차례 개가도 권하였으나 아주머니는 숭헌 소리 말라며 듣질 않는다. 폐병으로 육신이 무너진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오자 아주머니는 식모살이에 삯바느질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지극정성으로 그를 보살핀다. 물론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는 아저씨가 감옥에서 나올 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아주머니의 병구완으로 아저씨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돌보거나 아주머니를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도저히 못 끊으니 아편하고 꼭 같은 게 사회주의인가. ‘사람이란 것은 제가끔 분지복이 있어서 기수를 잘 타고나든지 부지런하면 부자가 되는 법이요, 복록을 못 타고나든지 게으른 놈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요, 다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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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진 《자전거 도둑》

    “쯔쯧, 이녁도 함경도 아바이 출신이믄 부랄값도 못하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드러케 다루는지는 알 만하잖소? 그걸 왜 내게 묻소 으응? 아 안 그렇소? 야! 간나야,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어서 말 좀 해보라우. 짐짓 호령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허공 높이 허우적거렸다. 길티……기게 바로 진짜 교육이야.‘나’는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자꾸 몰래 타는 범인이 바로 아파트 위층에 사는 에어로빅 강사 미혜임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볼 때마다 주인공 안토니오의 아들 브루노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나’는 ‘자전거 도둑’ 미혜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물품 도매상 혹부리 영감 앞에서 소주 두 병 때문에 어린 ‘나’를 때리는 연극을 감행했었다. 혹부리 영감에게 원한을 품은 ‘나’는 하수도를 통해 영감의 가게에 침입해 분탕질을 쳐 상품을 몽땅 판매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똥까지 싸놓는다. 충격받은 영감은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어두운 기억은 미혜에게도 있다. ‘나’의 집에 초대받아 와서 함께 <자전거 도둑>을 본 미혜는 주인공의 자전거를 훔쳤다가 들키자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청년이 어릴 때 죽은 오빠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미혜는 간질 환자 오빠를 홀로 집에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어린 ‘나’와 미혜는 간접살인을 한 셈이다. 둘은 함께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누지만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이후 미혜는 더 이상 ‘나’의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이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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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아 참, 빵 싫어한다고 했던가?”지금 눈앞의 파랑새가, 내 앞에 놓인 빵 쟁반을 치우려는 몸짓을 하고 말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우리 빵을 사 가는 단골손님이, 막상 빵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그래서 나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하지만 이제 네 사정을 알고 나니까 이해가 돼. 네가 빵을 좋아해서 사 간 게 아니라 단지 집에서 불편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재혼한 아버지와 불행한 소년주인공 ‘나’는 몹시 불행한 16세 소년인데 그 불행이 양과 질에 있어서 또래 청소년의 평균치를 심각하게 상회한다. 우선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다. ‘나’는 6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청량리역에 유기된다.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어 준 대보름빵을 먹다 혼절한 ‘나’는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자 내겐 새어머니와 두 살배기 의붓여동생이 생긴다. 초등학교 교사인 새어머니 배선생은 ‘나’를 학대할 목적으로 결혼했나 싶을 정도로 ‘나’를 미워한다.‘나’는 새어머니 눈에 띄지 않도록 존재감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간신히 생존한다. 말을 더듬는 증세까지 생겼다. 늘 밤늦게 귀가하는 아버지는 ‘나’의 사정을 모를뿐더러 안다고 하더라도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배선생이 밥을 주지 않으므로 ‘나’는 아파트 단지 입구의 빵집에서 빵을 사 먹고 연명한다. 불행은 계속될뿐더러 가속된다. 의붓동생 무희가 성폭행을 당한 징후가 발견된 후 유력한 용의자를 사법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