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순 <지나온 시간, 아직도 길 위에 서 있다>
광부들이 지하 갱도로 들어가며 “글뤽 아우프(살아서 지상에서 만나자)”라고 인사할 만큼 위험한 환경에 놓였던 것과 달리, 간호사들은 상대적으로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며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급여는 국내 병원보다 서너 배 많았고, 한국의 장관급 보수에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독일서 인정받은 한국 간호사환자들은 한국 간호사들을 친절하고 기술이 뛰어나 좋아했으며, 의사들은 특수 분야의 지식수준이 높고 상황 판단이 빠르다고 선호했다. 독일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슈베스터(자매) 김 데려오라”고 외치는 환자도 있었다.
간호사들은 휴일이 되면 유럽 국가를 여행 다녔다. 다만 한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저자는 궁여지책으로 일본 쌀과 일본간장을 구해 고국의 맛을 느끼려고 애썼다. 한국에서 소포가 도착하는 날이면 기숙사 방은 잔칫날이었다. 한국에서 온 라면, 김, 고추장을 나눠 먹으며 고향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저자는 “가난한 고국 현실이 마음에 걸렸다”며 “‘우리만 편하게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렌지 하나를 먹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적었다.
한 독일 병원에서 한국 간호사들이 향수병을 앓는 걸 알고 이미자의 노래를 구해 점심시간에 틀어주기도 했다. 노래가 흐르자 식당 안에 조용한 울음이 번졌다. 무조건 3년은 근무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서 견디느라 고생한 사람도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독일 병원들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남아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많은 이가 귀국했지만 독일에 남은 저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독일인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독일 일간지들이 서울 올림픽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소개하자 독일 사람들이 “대단하네”라고 인사해 울컥했다.역사를 잊지 않는 태도독일에서 계속 일하며 수간호사로 승진한 이도 있고, 숙련된 간호사로 자리 잡은 이도 있다고 전했다. 요양 서비스나 방문 간호 종사자도 있고, 무역과 여행업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독일 파견 인원은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만1057명으로 총 1만8993명이다. 이 중 60%는 독일에 잔류하거나 유럽, 북미 등으로 이주해 재외 한인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국내 거주 파독 근로자는 7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1965~1975년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고국에 송금한 액수는 1억 153만 달러였다. 이는 당시 GNP의 0.1%를 웃도는 규모였고, 총수출액의 1.6~1.9%에 해당했다. 1960년 우리 외환보유액은 2300만 달러였다. 1965년 광부와 간호사의 본국 송금액이 270만 달러였으니, 당시 외환보유고와 견주어도 적지 않은 규모의 외화를 벌어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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