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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계 통신 유자효

저 세상에서 신호가 왔다
무수한 전파에 섞여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는 단속음은
분명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까마득히 먼 어느 별에서 보내온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였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신호를 받고 있을 시각에
신호를 보내는 저 세상의 존재는 이미 없다
그 신호는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에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아득한 거리와 시간을 향하여 보내는 신호
살아 있는 존재는 어딘가를 향하여 신호를 보낸다
끊임없이 자신을 알리고자 한다
그 신호가 영원을 향하고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신이 보낸 신호라고 믿는다
신이 살지 않는 땅에서 받는
신들의 간절한 신호
오늘도 저 세상의 주민들은 신호를 보낸다
몇백 년 뒤, 몇천 년 뒤
결코 갈 수 없는 세상의 주민들에게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 70편최근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자효 시인의 불역 시집 <은하계 통신>에 실린 표제작입니다. 유자효 시인은 <은하계 통신(Communication intergalactique)>을 프랑스시인협회에서 출간한 것과 동시에 한·불 대역 시조집 <청자주병(Celadon de Goryeo)>을 프랑스어권작가·시인협회에서 출판했습니다.

<은하계 통신>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 70편이 실렸고, <청자주병>에는 단시조 50편과 연시조 20편이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수록됐습니다. 두 시집 모두 손미혜, 장-피에르 쥐비아트 번역가가 공동으로 번역했군요.표제시 ‘은하계 통신’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주는 침묵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뿐인가.’ 그러면서 시인은 과학적 상상을 넘어 존재와 소통,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하나의 시적 ‘신호’로 번역해 ‘송신’합니다.

“저 세상에서 신호가 왔다”는 첫 문장부터 시적 성찰과 과학적 상상력이 잘 결합돼 있지요. 시인은 전파 속에 섞여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는 ‘단속음’을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그것은 무수한 전파 속에서 아주 오래전에 발신된 것이며, 지금 우리가 그것을 수신하는 순간 그 발신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천문학에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별빛은 수천 년 전의 것이며, 정작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과학적 사실과 겹칩니다. 시인은 이처럼 과학의 언어를 빌려 인간 존재의 무상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열망을 담담하게 풀어냅니다.

특히 “결코 만날 수 없는/ 아득한 거리와 시간을 향하여 보내는 신호”라는 구절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으며, 비록 그것이 닿지 못할 대상일지라도 그 신호는 멈추지 않지요. 그래서 시인은 “살아 있는 존재는 어딘가를 향하여 신호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존재론적 고독과 동시에 거기서 피어나는 생의 의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물리학의 우주가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의 외침이고, 타인과의 단절 속에서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 내면의 간절함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신의 신호’라는 은유를 빌려 신성과 인간 존재를 연결합니다. “그 신호가 영원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신이 보낸 신호라고 믿는다”는 대목은 필멸의 존재로서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방식이 신앙의 형태로 이어진다는 점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군요.

그래서 이 시는 언어라는 통신 수단으로 세계와 소통하려는 존재론적 자세를 함께 비춥니다. 이는 어딘가에 반드시 닿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신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근본 속성과도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고 보니 문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신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조집 <청자주병>에 실린 첫 작품 ‘Distance(거리)’에도 이 같은 우주적 시공간이 연계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정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이 시조는 물리적인 거리의 존재가 오히려 그리움을 낳고, 존재 간의 연결을 더 깊고 단단하게 해준다는 성찰로 연결됩니다. 천문학적인 상상력과 인간적인 감수성을 엮어 우주의 이치를 그리움의 언어로 치환한 것이지요.

시집의 서문을 쓴 장 샤를 도르주 프랑스시인협회장은 유자효 시인의 시에 대해 “깊은 휴머니즘과 범지구적 우애, 국경과 분파가 없는 인간애에 바탕하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그의 시조에 대해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우주로 독자를 단숨에 끌어들인다”고 극찬했습니다.

이번 시집과 시조집은 지난 6월 ‘파리 시 전시회(Marché de la Poésie)’에 출품돼 현지 시인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프랑스 내 한국어과가 개설된 대학들에도 공급됐다고 합니다. 유자효 시인은 “현지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이 시대 사람들의 정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의 700년 된 전통 시조가 프랑스에 본격 소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1918년에 창간된 최초의 주간지 ‘태서문예신보’와 안서 김억이 펴낸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통해 서양시를 처음 만났는데 압도적 다수가 프랑스 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에 익숙하고, 폴 베를렌, 샤를 보들레르 같은 프랑스 시인들의 이름에 친숙하지요. 이번에 제 개인 시집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시 100선>과 <시조 100선> 등이 속속 출간돼 프랑스에 바야흐로 한국 시의 꽃이 만개한 느낌입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시가 프랑스에 더 많이 소개되길 바랍니다.”

유 시인은 KBS 파리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지요. 1972년 등단 이후 정지용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받았으며 2022~2023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습니다. 장 샤를 도르주 프랑스시인협회장과의 우정이 이번 번역 출판의 결실로 이어진 것을 보면서 앞으로 한국과 프랑스 문학의 교류 영역이 훨씬 넓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음미해보세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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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는 물리적인 거리의 존재가 오히려 그리움을 낳고, 존재 간의 연결을 더 깊고 단단하게 해준다는 성찰로 연결됩니다. 천문학적인 상상력과 인간적인 감수성을 엮어 우주의 이치를 그리움의 언어로 치환한 것이지요. 시집의 서문을 쓴 장 샤를 도르주 프랑스시인협회장은 유자효 시인의 시에 대해 “깊은 휴머니즘과 범지구적 우애, 국경과 분파가 없는 인간애에 바탕하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그의 시조에 대해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우주로 독자를 단숨에 끌어들인다”고 극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