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변화와 탄력성

프랑스 고급 와인으로 꼽히는 ‘보르도 와인’ 가격이 최근 11년 새 최저치를 기록했다. 4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프랑스 보르도 지역 와인 양조장(와이너리)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샤토 앙젤루스는 2024년산 와인의 판매 가격을 기존 판매가 대비 30% 이상 낮췄다. 라피트 로칠드의 가격은 최고 병당 288유로, 앙젤루스의 가격은 최고 병당 180유로로 2014년 후 가장 낮은 가격을 기록했다.
- 2025년 5월 5일 자 한국경제신문 -
전 세계 와인 수요 감소로 콧대 높던 프랑스 보르도산 명품 와인마저 줄줄이 가격 인하에 나서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최근 마트나 백화점의 와인 매장에서 예전만큼 활기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시절 ‘와인 붐’이라 할 정도로 인기를 끌던 와인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프랑스에선 와인메이커들이 가격 방어를 위해 애써 만든 와인을 폐기 처분을 한다는 뉴스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이 현상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겠습니다. 먼저 와인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수요의 감소가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힙니다. 경제학에서 ‘수요’란 소비자가 어떤 상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욕구를 뜻합니다. 수요의 법칙에 따르면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수요량은 줄고, 가격이 내리면 수요량은 늘어납니다.
와인의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와인, 특히 10만원 이상 고급 와인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고급 와인의 가격은 최근 5년 사이 2배 가까이 올랐지만, 1만~3만원대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전체의 평균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와인을 덜 사고 있습니다. 이는 수요곡선 자체가 왼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가격 변화 때문이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 욕구가 전반적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즉, 수요량 감소가 아니라 수요 전체적으로 감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와인 공급은 오랜 기간 줄고 있습니다.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와인 생산량은 2억3730만 헥토리터(Mhl)로, 20년 전인 2004년 2억9500만 헥토리터보다 약 20% 감소했습니다. 수요 감소와 기후변화 등이 중첩된 결과인데요, 공급 감소에도 가격이 오르지 못할 정도로 수요가 더 크게 줄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와인의 수요가 줄어든 데엔 여러 경제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와인이 소득이 줄면 수요가 줄어드는 ‘사치재’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생활필수품이라기보다 ‘있으면 좋은’ 사치재지요. 와인의 가격은 750ml 한 병당 몇천원에서 수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평균가격은 약 1만원대 중·후반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와인업계에서 1만원대 와인은 저가 와인으로 분류하지만, 500ml 캔당 2000~4000원대인 맥주나 소주 등 다른 술에 비해선 고급에 속합니다. 경기침체로 가계의 지갑이 얇아지고, 물가가 오르면서 실질소득이 줄면 사람들은 와인 같은 고급 음료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상품을 선택하게 됩니다.
소득이 1% 변화할 때 수요가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수요의 ‘소득탄력성’이라고 하는데요, 사치재는 소득탄력성이 1보다 큽니다. 경기침체로 소득이 줄었을 때 기본적인 식사는 줄일 수 없지만 와인 같은 사치재 소비는 아예 끊을 수 있겠지요.
와인 대신 마실 대체재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 또한 와인 수요 감소의 한 요인으로 꼽힙니다. 요즘은 다양한 주류 제품이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수제 맥주, 칵테일, 저알코올 음료, 무알코올 맥주, 심지어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와인까지 등장했지요. 이들은 모두 와인을 대신할 수 있는 대체재입니다.
인구구조의 변화도 와인 수요 감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와인은 보통 최소 3~4인 이상 술자리나 가족, 회사 모임 등 특별한 행사에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실주인 와인은 증류주인 위스키와 달리 코르크 마개를 연 뒤엔 하루 이틀 안에 마셔야 변질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보통 와인은 그 자리에서 최소 한 병을 모두 비우는 경우가 많죠.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전체 가구의 15.5%에 불과하던 1인 가구의 비중은 2023년 35.5%로 증가했습니다. 혼자 술을 즐기는 ‘혼술족’이 늘고 있다지만 도수가 13~15도에 달하는 와인 한 병을 혼자 비우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요. 이처럼 와인을 함께 나누는 문화가 점차 줄어들면서 와인의 소비 패턴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주류가 되며, 전통적 와인 시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셈입니다. NIE 포인트

2. ‘소득 탄력성’에 따라 재화의 성격을 구분해보자.
3. 대체재가 많아지면 ‘가격 탄력성’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