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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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세르게이 예세닌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으로 가득 차고
저녁은 나의 길 위에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인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숲속에서 노래하는 이가 바람인지 수탉인지?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여!
두 손을 꼭 모아쥐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잘 있거라 벗이여

잘 있거라, 벗이여, 안녕.
사랑스런 그대는 내 가슴에 있네.
우리 이별은 예정된 것이언만
내일의 만남을 약속해주는 것.
잘 있거라, 벗이여, 인사도, 악수도 필요없느니,
한탄하지 말고 슬픔에 찌푸리지도 말게,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

*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 : 러시아 시인.

오늘은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 두 편을 함께 음미해보겠습니다. 예세닌은 사랑과 낭만, 혁명을 노래하며 불꽃처럼 살다 간 시인입니다. 러시아 시인 가운데 푸시킨 다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을 바탕으로 한 시를 발표하며 ‘마지막 농촌 시인’으로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죠. 폭압적 제정 시대와 스탈린의 공포정치 속에서 ‘술과 광기로 인생을 견뎌내고’ 30세에 자살한 비운의 시인이었으니까요.“사회주의는 모든 걸 죽이기만 한다”그는 러시아혁명에 동참했지만 곧 환상에서 깨어난 뒤 “사회주의는 꿈도 없고 모든 걸 죽이기만 한다”며 절망했습니다. 이후 반항자가 되어 농민전쟁을 테마로 한 ‘푸가초프’,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을 그린 ‘선술집 모스크바’ 등을 잇달아 썼지요.

이 때문에 스탈린 정부로부터 “비속한 말과 술취한 광인의 눈물로 얼룩져 있기에 누구의 작품보다도 해롭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세닌주의’는 곧 불명예의 표상이었죠.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러시아 동토에 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 그에게는 ‘인민에게 유독한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의 죽음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속 보물을 두 줌 뿌린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뛰어났죠.이사도라 덩컨의 연인예세닌의 삶에서 ‘맨발의 춤꾼’ 이사도라 덩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혁명 후 모스크바에 무용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44세의 덩컨은 열일곱 살 연하인 예세닌에게 한눈에 반했지요. 둘은 1922년 결혼했으나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2년 만인 1924년에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예세닌은 신경쇠약과 알코올중독, 피해망상에 시달렸지요. 1925년 12월 21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앙글르테르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3년 전 덩컨과 신혼의 꿈에 젖던 곳이죠. 27일 그곳에서 그는 잉크가 없자 손목을 긋고 자신의 피로 시를 썼습니다. 그 시가 바로 ‘잘 있거라, 벗이여’이지요. 다음 날 그는 창문에 목을 맸습니다(덩컨은 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다 1927년 바람에 날린 숄이 오픈카 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졌지요).

또 한 사람, 러시아혁명 시인이자 예세닌의 라이벌이던 마야코프스키(1893~1930)도 있습니다. 그는 예세닌의 시 ‘잘 있거라, 벗이여’의 마지막 구절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네”에 “인생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지,/ 살아내는 것이 더 어렵다네”로 화답해 화제를 모았지요.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세르게이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 또한 5년 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두가 혁명기의 불운한 천재들이었지요. 순백의 첫눈에 들뜨던 청춘의 시인과 암울하던 역사의 그림자를 한 폭의 풍경화에 겹쳐놓은 듯한 사연들입니다.√ 음미해보세요
시인
시인
예세닌은 러시아혁명에 동참했지만 환상에서 깨어난 뒤 반항자가 되어 농민전쟁을 테마로 한 ‘푸가초프’,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을 그린 ‘선술집 모스크바’ 등을 잇달아 썼지요. 이 때문에 스탈린 정부로부터 “비속한 말과 술취한 광인의 눈물로 얼룩져 있기에 누구의 작품보다도 해롭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의 죽음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그의 시는 마치 그의 마음속 보물을 두 줌 뿌린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뛰어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