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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의 벤치에서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 구상(具常, 1919~2004) : 시인, 언론인.

구상(具常) 시인이 노년에 쓴 시입니다. 제목 ‘드레퓌스의 벤치’는 영화 <빠삐용>(1973)에 나오는 악마섬(le du Diable, 프랑스령 남미 기아나의 외딴섬) 벼랑에 있는 긴 의자를 가리킵니다. 유대계 프랑스 대위로 반역죄에 몰려 빠삐용처럼 이 섬에 갇혔다가 에밀 졸라 등의 노력으로 풀려난 드레퓌스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부제의 ‘짱’은 빠삐용이 탈출하도록 몰래 도운 뒤 악마섬에 그대로 남은 동료 죄수의 이름입니다.

영화 <빠삐용>은 잘 알다시피 한 무기징역수의 실록 자서전을 각색한 거죠. 주인공 앙리 샤리에르(스티브 매퀸 분)는 가슴에 나비 문신이 있어 빠삐용(Papillon, 프랑스어로 ‘나비’)으로 불렸습니다. 별명만큼이나 자유를 향한 갈구가 강했던 그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했죠.

그는 1931년 파리의 악덕 포주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지만 끝내 종신형을 받고 유형의 섬에 갇히고 말았지요. 3년 뒤 첫 번째 탈옥에 성공한 그는 조각배로 약 2900km를 항해해 정글 지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원주민과 함께 살며 도피 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추격자에게 붙들려 5년의 독방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으로 이송됐습니다. 이곳에서 백발이 되고 이가 다 빠지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미에서 식당…책도 500만 부 이상 팔려드디어 운명의 날,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야자열매를 엮은 부대 자루를 던지고 바다로 뛰어든 그는 집채만 한 파도를 헤치며 먼 수평선으로 나아갑니다. 함께 가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남은 동료 드가(더스틴 호프만 분)가 멀어져가는 그를 오래 지켜보다 발길을 돌리는 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죠.

구상의 시는 바로 이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라는 독백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군요.

영화는 이렇게 끝나지만 현실의 뒷얘기는 더욱 극적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실존 인물 앙리 샤리에르는 베네수엘라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식당을 차려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환갑이 넘은 1969년 자서전 <빠삐용>을 써서 500만 부 이상 대박을 터뜨렸는데, 이 덕분에 죽기 3년 전엔 사면까지 받았다고 하죠.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은 진정한 자유와 참다운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구도자적인 시인의 눈을 통해 돌아보는 생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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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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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운명의 날,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야자열매를 엮은 부대 자루를 던지고 바다로 뛰어든 그는 집채만 한 파도를 헤치며 먼 수평선으로 나아갑니다. 함께 가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남은 동료 드가(더스틴 호프만 분)가 멀어져가는 그를 오래 지켜보다 발길을 돌리는 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죠. 구상의 시는 바로 이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라는 독백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