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오상준 <6·25전쟁 폐허 속에서 핀 인류애 : 리차드 위트컴>


한국전쟁 때 유엔군 가운데 미군 전사자가 가장 많았으나 미국은 3만6492명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이송했다. 휴전 후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에서 한국에 안장되기를 희망한 40명만이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모두 사병 출신이다. 장성 출신으로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사람은 리차드 위트컴 한 명뿐이다.
‘알면 알수록 감동적인 사나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나이,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위트컴 장군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였던 1953년 유엔군 제2 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의 계급은 준장이었다. 1954년 말에 전역한 후 한국에서 살다가 1982년 7월 12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지 40년 만인 2022년 위트컴 장군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최고 영예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군수물자로 이재민을 돕다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군 장성](https://img.hankyung.com/photo/202310/AA.34821475.1.jpg)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위트컴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발판이 된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수송과 보급 전문가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위트컴 장군이 한국에 부임한 1953년, 부산에 엄청난 불이 났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앞 대화재로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국가도 대책을 세울 수 없었던 전쟁 직후, 위트컴 장군은 대규모 천막촌을 마련하고 침대와 이불, 옷과 식량까지 제공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미국으로 소환되어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이 “군수물자를 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사용했느냐”고 호통치자 위트컴이 답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이 답변으로 위트컴은 큰 박수를 받았고, 구호금을 모금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트컴 장군은 폐허가 된 부산의 도시 기능을 살리기 위해 AFAK(미군대한원조)를 발족하고 191개 사업을 진행했다. 1953년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00만 달러의 AFAK 예산이 부산에 투입됐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AFAK는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 건립 지원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 도로 개설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고, 그 중심에는 위트컴 장군이 있었다.위트컴을 기리는 부산 시민들1954년 말 퇴역한 이후 위트컴 장군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의 재건을 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으로 일하며 한미재단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고, 한국인 아내와 함께 장진호에서 전사한 미 해병의 유해 발굴을 위해 힘썼다.
2011년부터 부산시와 뜻있는 사람들이 위트컴 장군 기리기에 나섰고, 부산 시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위트컴 장군 기념 조형물’을 오는 11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