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합스부르크 왕가 (上)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궁전. /한경DB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궁전. /한경DB
합스부르크 가문은 19세기까지 유럽 최대 지배가문이었다. 184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재위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영지(저지와 상부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스티리아 공작령, 카르니오라와 카린티아, 티롤 백작령, 포랄베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이스트리아 변경백령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시)와 헝가리 국왕령(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헝가리 군사 접경구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령(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령, 상부 및 저지 실레지아 공작령)과 갈리시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령, 부코비나 공작령, 달마티아 왕령, 잘츠부르크 공작령도 그의 땅이었다. 여기에 비록 종이 위의 명목상 영지이긴 하지만 상부 및 저지 루사티아와 로렌, 키부르크도 법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다. 1291년 이후 실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왕국도 이론적으로는 그의 지배지에 포함됐다.

과거 스페인 펠리페 2세 시대에 비해 제국의 규모가 줄어든 19세기에도 합스부르크가(家)의 위세는 대단했다. 가문은 37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25만7478㎢의 영지를 보유하면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 내 인종도 550만 명의 독일인과 500만 명의 마자르족, 400만 명의 이탈리아인, 300만 명의 체코인, 250만 명의 루데네인, 200만 명의 루마니아인,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으로 구성됐다. 150만 명 규모의 슬로바키아인과 비슷한 규모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의 슬로베니아인과 75만 명의 유대인, 50만여 명의 집시와 기타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도 제국의 신민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제국이 민족단위별로 산산이 쪼개져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앤드루 위트크로프트는 1900년 파리 박람회의 한 장면을 통해 합스부르크제국의 후진성을 상징적으로 꼬집는다. 당시 오스트리아 육군은 박람회 대상을 탔다. 그런데 수상 이유가 가장 좋은 총을 갖추고 있어서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신형 대포를 보유해서도 아니다. 가장 우아한 군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한 박한 점수는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부각된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에 비해 더더욱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게 이유다.

무엇보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던 국가에선 특히 평이 좋지 못했다. 1950년대까지 헝가리 역사학자들은 헝가리가 허울만 ‘이중제국’이었을 뿐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에 불과했다고 봤다. 헝가리 역사가 오스카 야스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자본이 결탁해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라브 지역민이 거주하던 곳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단언했다.

민족감정에 덜 치우쳤던 역사가들도 지리적 이유 등으로 제국이 경제적 중심지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넓은 제국은 지리적으로 통합돼 있지 못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아드리아해 주요 항구로 가는 내륙 수운도 갖추지 못했고, 도나우강은 당시 선박 운항이 쉬운 항로가 아니었다. 제국 전체의 3분의 2가량은 산악지대나 구릉지였다. 이에 보헤미아는 강의 수운을 따라 오스트리아보다 독일 경제권에 편입됐고, 갈리시아와 부코비나는 험준한 산맥 탓에 제국 내 다른 경제권과 연결이 끊겼다고 평했다. 포랄베르크는 정치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영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스위스와 슈바벤의 면직공업지대에 속한 측면이 더 컸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합스부르크제국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데이비드 굿 미네소타대 교수 등이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합스부르크제국 내 지형적 제약이 극복됐고, 은행망을 통해 금융산업 발전이 두드러졌다는 설명을 내놨다. 제국 내 지역적 경제통합도 탄력을 받았다고 본다. 1910년 시점에 범헝가리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선 인구 10만 명당 96㎞의 철도망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지역에선 82㎞ 규모의 철도망을 갖췄다고 지적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본토에 필적하는 규모이며 루마니아(49㎞), 불가리아(42㎞), 세르비아(31㎞)에 비해 헝가리 지역은 차별받기보다 개발의 혜택이 있었다는 시각이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합스부르크 가문의 연보를 살펴보자.

2. 전성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한 영토의 범위를 지도를 펴고 확인해보자.

3. 합스부르크 왕가가 광범위한 영토를 확보할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