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프랑스 국민 배우 알랭 들롱이 최근 국내에서도 다시 뉴스메이커가 됐다. 이번엔 영화나 문화 얘기가 아니다. 인간 최후의 단계, 죽음에 대한 그의 선택이 그를 기억하는 옛 팬들에게 전해진 메시지였다. ‘세기의 미남’이라는 들롱이 안락사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스위스 이중 국적자인 그는 현재 스위스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35년생인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순간을 결정하면 임종을 지켜봐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2019년 뇌졸중 수술 후 안락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스위스는 자기 생명을 본인이 결정하는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한국은 초보적 단계지만 많은 나라에서 안락사의 정당성과 허용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과 논쟁을 벌여왔다. 안락사, 허용할 것인가. [찬성] 중증환자 극한 고통 덜어줘야 웰빙 이어 웰다잉 … 개인 고유 권한인간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면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다. 생명 그 자체가 각 개인의 유일무이한 고유의 것으로 불가침의 영역이다. 오직 자신이 자기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알랭 들롱은 과거에도 “특정 나이, 특정 시점부터 우리는 병원이나 생명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고 말해왔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뜻을 우회적으로 둘러말한 것이다.
조용히 떠날 권리는 물론, 고통 없이 떠날 권리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말한다. 늙고 노쇠하면 온갖 병이 드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 수월하고 편안하게 임종하는 사례는 드물다.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말기 암, 자기 아들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치매, 혼자 이동할 수 없어 침대에만 갇혀 있는 노환, 식사도 못해 누군가 음식을 수발해야 하는 중증 환자, 심지어 본인 대소변을 처리 못해 가족이 일일이 뒤처리를 해줘야만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자신의 말 못할 고통도 고통이지만, 가족과 보호자의 고충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삶을 억지로 유지하게 하는 것이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길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웬만한 진통제로도 통증이 관리되지 않는 신경계통 이상의 중증 환자, 24시간 간병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재활 가능성도 없는 환자 입장이 어떨지 한번 가정해보라.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지옥 같은 고통의 나날이 될 수 있다.
이런 환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 웰빙(well being)에 이어 웰다잉(well dying)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지도 오래다. 웰다잉의 핵심도 이 문제다. 젊어서부터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해둔 경우나 정신적으로는 정상인 중증 환자의 자기 결정은 발달한 의료가 도와줄 필요가 있다. 인류애에 대해 적극적 해석을 할 때다. [반대] 사형제도 왜 없어지나 한 번 잘못한 결정 돌이킬 수 없어생명은 숭고하다. 왜 숭고한 것이라고 하는가. 그 끝을 쉽게 결정할 수 없고, 한 번의 결정이 잘못됐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근대 이전에 보편적이었던 사형제도에 왜 많은 나라가 반대하면서 추방하고 있는가. 잘못된 판단을 돌이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대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앗을 권리는 없다는 성찰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안락사도 크게 봐서 같은 맥락의 논쟁점이다. 사형제도만큼이나 무고한 생명,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락사의 절차를 아무리 투명하게 하고, 본인의 의사를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에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완벽하게 배제하지 못한 채 어떻게 유일무이한 생명을 주사 한 방으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종교적인 문제도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특히 안락사를 반대하고 있다. 한국적 전통의 유교 문화에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소중한 육신을 스스로 버리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락사를 인정하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희석되고 생명 경시 분위기가 생길 수 있다. 안락사가 인정되는 마당에 자살의 조력 같은 일도 흔해질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안정된 개인의 삶과 사회 발전에 도움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심지어 안락사를 가장한 범죄 행위도 미리 걱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는 살인이라는 중범죄가 된다.
단순히 중증 환자에 대한 배려 등 의학적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 종교 윤리 도덕과 맞닿는 중요한 문제다. 성숙한 사회적 공론이 다각도로 필요하고, 그런 이후에도 최종 결정에는 신중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 여러 형태의 고통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철학적 성찰도 필요하다. 부족함이 적고 모든 것이 편리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질병과 노환이 당면 문제라면 의료·의학 발전에 한층 매진해야 한다. √생각하기 - 연명치료 거부자 121만명, 안락사 긍정기류…선진국 사례 연구 필요 노령사회가 되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가 생긴다. 치매를 예로 볼 때,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보건복지부 관련 공무원의 접근 방식이 확 달라진다고 한다. 그만큼 실감을 하면 모든 현상이 달라진다. 객관적 관점에서 이론을 말하는 것과 한번 당해본 입장은 천지 차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제적으로 잘살고, 대체로 이성과 합리가 통하는 국가다. 생전에 연명치료 거부를 서약한 사람이 국내에서만 121만 명에 달하는 점을 보면 안락사에 대한 바람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 존엄한 죽음의 길이 무엇인지,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공론화를 시작할 때가 됐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조용히 떠날 권리는 물론, 고통 없이 떠날 권리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말한다. 늙고 노쇠하면 온갖 병이 드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 수월하고 편안하게 임종하는 사례는 드물다.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말기 암, 자기 아들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치매, 혼자 이동할 수 없어 침대에만 갇혀 있는 노환, 식사도 못해 누군가 음식을 수발해야 하는 중증 환자, 심지어 본인 대소변을 처리 못해 가족이 일일이 뒤처리를 해줘야만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자신의 말 못할 고통도 고통이지만, 가족과 보호자의 고충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삶을 억지로 유지하게 하는 것이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길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웬만한 진통제로도 통증이 관리되지 않는 신경계통 이상의 중증 환자, 24시간 간병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재활 가능성도 없는 환자 입장이 어떨지 한번 가정해보라.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지옥 같은 고통의 나날이 될 수 있다.
이런 환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 웰빙(well being)에 이어 웰다잉(well dying)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지도 오래다. 웰다잉의 핵심도 이 문제다. 젊어서부터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해둔 경우나 정신적으로는 정상인 중증 환자의 자기 결정은 발달한 의료가 도와줄 필요가 있다. 인류애에 대해 적극적 해석을 할 때다. [반대] 사형제도 왜 없어지나 한 번 잘못한 결정 돌이킬 수 없어생명은 숭고하다. 왜 숭고한 것이라고 하는가. 그 끝을 쉽게 결정할 수 없고, 한 번의 결정이 잘못됐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근대 이전에 보편적이었던 사형제도에 왜 많은 나라가 반대하면서 추방하고 있는가. 잘못된 판단을 돌이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대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앗을 권리는 없다는 성찰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안락사도 크게 봐서 같은 맥락의 논쟁점이다. 사형제도만큼이나 무고한 생명,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락사의 절차를 아무리 투명하게 하고, 본인의 의사를 거듭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에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완벽하게 배제하지 못한 채 어떻게 유일무이한 생명을 주사 한 방으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종교적인 문제도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특히 안락사를 반대하고 있다. 한국적 전통의 유교 문화에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소중한 육신을 스스로 버리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락사를 인정하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 희석되고 생명 경시 분위기가 생길 수 있다. 안락사가 인정되는 마당에 자살의 조력 같은 일도 흔해질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안정된 개인의 삶과 사회 발전에 도움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심지어 안락사를 가장한 범죄 행위도 미리 걱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는 살인이라는 중범죄가 된다.
단순히 중증 환자에 대한 배려 등 의학적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 종교 윤리 도덕과 맞닿는 중요한 문제다. 성숙한 사회적 공론이 다각도로 필요하고, 그런 이후에도 최종 결정에는 신중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 여러 형태의 고통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철학적 성찰도 필요하다. 부족함이 적고 모든 것이 편리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질병과 노환이 당면 문제라면 의료·의학 발전에 한층 매진해야 한다. √생각하기 - 연명치료 거부자 121만명, 안락사 긍정기류…선진국 사례 연구 필요 노령사회가 되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가 생긴다. 치매를 예로 볼 때,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보건복지부 관련 공무원의 접근 방식이 확 달라진다고 한다. 그만큼 실감을 하면 모든 현상이 달라진다. 객관적 관점에서 이론을 말하는 것과 한번 당해본 입장은 천지 차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제적으로 잘살고, 대체로 이성과 합리가 통하는 국가다. 생전에 연명치료 거부를 서약한 사람이 국내에서만 121만 명에 달하는 점을 보면 안락사에 대한 바람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 존엄한 죽음의 길이 무엇인지,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공론화를 시작할 때가 됐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