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조선의 경제와 화폐 (上)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했던 조선초기…비단은 중국·금은 일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1394년 집필한 《조선경국전》에서 장인과 상인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아닌 ‘부차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또 상공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농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생겨선 안 된다는 유학사상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조선은 정도전의 구상처럼 ‘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모시와 비단의류, 신발, 가구, 부엌가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적인 장인은 언제나 소수였다. 제철과 야금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

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했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중앙정부 고용 장인 숫자 6600명 제한지방에선 노동 분화가 별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장인이 무기, 농기구, 종이, 베개 등을 생산했다. 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했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상도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감영에는 12명 안팎의 ‘많은’ 장인이 배속됐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비단산업을 증진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못했다. 높은 품질의 비단제품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 수입됐다. 면화씨는 1364년(공민왕 13)께 한국에 처음 들어왔지만, 1460년대까지 면포는 의류를 만드는 주요 소재가 되지 못했다.

광업 역시 자진 폐업하다시피 했다. 금, 은, 납, 철, 구리, 유황 등이 주요 채굴 광물자원이었지만, 주요 활동은 중국에 조공하기 위한 금과 은을 생산하는 데 집중됐다. 이마저도 “조선에선 금, 은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조공 부담을 피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귀금속 생산량은 많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금 수출을 제한했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물량을 몰수하기도 했다.

1429년 명나라로부터 금, 은의 조공을 면제받은 뒤에도 “중국이 다시 조공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금 채광은 확대되지 않았다. 광업이 확대되면서 농업 노동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이 같은 결정이 나온 배경에 있었다. 결국 풍년이 든 해에 5~6일 정도만 광업이 허용됐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금 수입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1430년(세종 12) 무렵 전국에는 66개의 철광과 17개의 제련소가 있었지만 철광석 채광활동은 농한기에도 규제됐다. 구리 채광은 1423년(세종 5) 태종조에 시작된 저화(지폐) 유통정책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진됐다. 하지만 그레셤의 법칙이 작동하면서 동전이 화폐 가치 하락 탓에 유통되지 않았고, 화폐 주조도 1445년(세종 27) 막을 내렸다.종이화폐 문제 해결 위해 구리 채광 나섰지만저화는 초기부터 도입 의도와 달리 골칫거리가 됐다. 1402년(태종 2) 정월 저화가 처음 보급될 무렵 저화 가격은 1장당 오승포(五升布) 1필 내지는 미(米) 2두로 책정됐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만인 1415년(태종 15) 6월께가 되면 저화 가격은 1장당 미 2승에 해당할 정도로 폭락했다. 원재료인 종이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고액이었던 탓이 컸다.

세종조에도 저화 가격 하락은 이어져 1422년(세종 4) 12월에 저화 3장으로 겨우 미 1승을 살 수 있을 지경이 됐다. 정부는 저화 유통을 강제하기 위해 오승포로 대표되는 물품화폐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자를 중죄에 처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1419년(세종 원년) 4월 태환보증을 위해 군자감의 미두 600석을 방출한 것을 시작으로 1421년(세종 3) 6월에 1만 석, 1423년(세종 5) 정월에 3000석을 방출하는 등 국고 물자를 내놓으며 화폐 가치 안정에 나섰지만 또 실패했다. 정부의 화폐 보급 의지와 달리 민간의 유통 상황은 극히 부진했던 탓이다. NIE 포인트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했던 조선초기…비단은 중국·금은 일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
1. 유학 사상이 시장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학습해보자.

2. 조선이 상공업 활성화 정책을 폈다면 어떤 사회 변화를 불러왔을까.

3. 조선초기 화폐가치가 하락한 이유를 조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