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 기자의 키워드 시사경제 - 카니발리제이션
신제품이 기존제품 매출 깎아먹는 현상
동족을 해치는 '카니발리즘'에서 유래
치열한 시장 경쟁 속 많은 기업의 고민
자기잠식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에 성장 가능성 남아있다는 의미
경쟁사에 뺏기기 전 과감히 도전해야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서 사진을 찍던 시절, 필름 시장의 독보적인 1위 업체는 미국 코닥이었다. 1880년 설립된 이 회사는 세계 표준이 된 35㎜ 필름을 내놨고 시장점유율이 한때 90%에 달했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급속한 확산에 대응하지 못하고 201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지금은 변화를 두려워하다가 망한 기업의 대표적 사례로 경영학 교재에 남아 있다.신제품이 기존제품 매출 깎아먹는 현상
동족을 해치는 '카니발리즘'에서 유래
치열한 시장 경쟁 속 많은 기업의 고민
자기잠식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에 성장 가능성 남아있다는 의미
경쟁사에 뺏기기 전 과감히 도전해야
사실 코닥은 1975년 일찌감치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해 뒀다. 세계 최초 디지털 카메라를 1981년 출시한 일본 소니보다 6년 앞섰다. 하지만 만들기만 하고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괜히 필름 매출만 깎아먹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훗날 공개된 1981년 코닥의 내부 보고서는 디지털 카메라가 불러올 시장 충격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대응을 망설이다가 최대 희생양이 된 셈이다. 한 식구인데…아이패드와 맥북이 싸운다?코닥이 걱정했던 상황을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자기잠식 효과’라고 한다. 기업이 새로 내놓은 제품이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존 주력 상품의 매출을 떨어뜨리는 현상을 뜻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약간 섬뜩하다. 동족 살해를 뜻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서 유래한 것이다.
카니발리제이션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기업의 고민거리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갤럭시A라는 이름으로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할 당시 고가 제품인 갤럭시S 매출을 잠식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수익성 낮은 신제품이 수익성 높은 기존 제품을 대체하면 회사 전체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하이트진로가 테라라는 맥주를 선보일 때는 같은 회사의 하이트가, 농심이 짜왕을 내놓을 때는 짜파게티가 비슷한 걱정을 들었다.
하지만 자기잠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제품 출시를 미루면 경쟁사에 기회를 내주는 꼴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경쟁사의 시장 침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한다. 애플의 경우 맥북 수요를 빼앗을 수 있는 아이패드, 아이팟 수요를 잠식할 수 있는 아이폰 등을 지속적으로 내놓으면서도 성장을 이어왔다. 뒤집어보면 자기잠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에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뜻도 된다.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경쟁사가 비집고 들어온다는 얘기다. 자기잠식 겁내는 기업, 성장에 한계 올 수도은행연합회는 최근 금융위원회에 “금융지주도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서를 냈다고 한다. 인터넷은행은 점포 없이 온라인으로만 영업하는 은행으로,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 두 곳이 영업 중이다. 은행연합회의 요구는 국민·신한·하나·우리 같은 대형 금융그룹도 인터넷은행을 직접 세워 경영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오프라인 점포와 직원이 많은 전통 은행의 특성상 아무리 애를 써도 디지털 전환 경쟁에서 인터넷은행에 뒤처진다는 이유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카니발리제이션을 우려해 인터넷은행 진출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많다고 한다. 은행들의 요구는 아직 가벼운 아이디어 수준인데, 향후 전개가 주목된다.
기업들의 경쟁은 ‘졸면 죽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숨가쁘고 치열하다. 《혁신 기업의 딜레마》라는 경영학 서적으로 유명한 고(故)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선도기업의 실패 원인이 “해오던 방식대로만 열심히 해서”라고 짚었다. 만약 40여 년 전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내놓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필카’에 이어 ‘디카’ 시장까지 장악하며 승승장구하진 않았을까. 물론 코닥이 영원히 사진 명가의 위상을 지켜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디지털 카메라조차 스마트폰에 밀려 순식간에 시장이 쪼그라들었으니 말이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