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가 시각장애인을 가리키는 말로 외연을 넓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이 말이 우리말 체계 안에서 또 하나의 차별어
목록에 편입될지 '언어의 자유로운 시장'에 맡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사진=뉴스1
사진=뉴스1
코로나19가 한창 재확산하던 지난 8월 31일.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조금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를 얘기를 꺼냈다. “‘깜깜이 감염’과 관련해서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시면서 개선을 요청해 왔습니다. 저희는 국민들 의견을 받아서 그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염경로 불명’을 대체어로 제시했다. ‘깜깜이’는 사전에 없는, 의미확장 중인 단어코로나19는 우리말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그중 하나가 이날 발언으로 새삼 부각된 ‘우리말 속 차별어’ 논란이다.

‘깜깜이’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정식 단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이 언중 사이에 알려진 게 그리 오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는 올라 있다. 나중에 조건이 충족되면 단어가 될 수 있는 후보군에 있다는 얘기다.

‘깜깜이’는 주로 언론에서 써온 말이다. ‘깜깜이 선거, 깜깜이 분양, 깜깜이 입찰, 깜깜이 리포트, 깜깜이 심사’ 등 비유적 표현에 사용됐다. 이 말은 어디서 왔을까? ‘깜깜하다’에서 생성됐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말에서 ‘깜깜하다’란 말은 어떤 의미로, 어떤 맥락에서 쓰일까? 이게 차별어 여부를 판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깜깜하다’는 ‘어떤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잊은 상태이다’란 뜻이다. “나는 음악에 깜깜해”라고 하면 음악에 관해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파생어 ‘깜깜이’가 나왔다. 어근 ‘깜깜’에 접미사 ‘-이’를 붙여 만들었다. ‘-이’는 여러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일부 명사/어근 등의 뒤에 붙어서 ‘그런 속성을 지닌 사람(또는 상태)’이란 뜻을 더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유시장’에서 쓰임새 지켜볼 일그러니 ‘깜깜이’라고 하면 어떤 사실에 대해 정보가 없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 또는 상태를 가리킨다. 가령 ‘깜깜이 선거’라고 하면 입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르는 선거를 말한다. “깜깜이 주식투자를 한다”고 하면 주식에 관해 잘 모른 채 하는 투자를 지적하는 것이다. 어근 ‘깜깜’과 결합한 합성어도 많다. ‘깜깜무소식, 깜깜나라, 깜깜무식, 깜깜무식쟁이, 깜깜밤중, 깜깜속, 깜깜절벽’ 같은 게 그런 예다. 파생어 ‘깜깜이’나 이런 합성어들은 ‘깜깜’의 뜻과 쓰임새가 시각장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깜깜이’가 사전 정보나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의미확대’가 이뤄진 결과다. 의미확대란 단어 본래의 의미보다 그 뜻의 사용 범위가 넓어지는 일을 말한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언어의 쓰임새가 확장되고 변형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가령 옛날에 머리에 쓰던 의관(衣冠)의 하나인 ‘감투’가 지금은 벼슬이나 직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게 그런 경우다. ‘깜깜’ 역시 본래 ‘아주 까맣게 어두운 모양’에서 지금같이 ‘어떤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잊은 모양’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깜깜이’는 그런 쓰임새가 반영돼 생긴 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그 연장선에서 ‘깜깜이’가 시각장애인을 가리키는 말로 외연을 넓히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그런점에서 ‘깜깜이’는 진화과정 중에 있다고 할 만하다. 이 말이 우리말 체계 안에서 또 하나의 차별어 목록에 편입될지 ‘언어의 자유로운 시장’에 맡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깜깜이’가 어떻게 정립될지, 언중의 선택은 무엇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