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 결과를 브리핑하는 정은보 한국 측 수석대표(왼쪽)와 미국 측 수석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 선임보좌관.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 결과를 브리핑하는 정은보 한국 측 수석대표(왼쪽)와 미국 측 수석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 선임보좌관.
[사설] '협상'이 '전쟁'이 된 시대, 우리의 역량 괜찮은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예전과 달리 상당히 거칠게 진행되고 있다. 그제 7시간 예정으로 서울서 열린 협상에서 미국 대표단이 1시간30분 만에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면서 과거에 없던 파행이 빚어졌다. 이후 양쪽의 직설적인 별도 브리핑을 보면 협상 자세뿐 아니라 기본인식의 간극이 상당히 커 보인다. 최근 복잡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미, 한·미·일 간의 외교안보 관계까지 감안할 때 미국 측 의도를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단순히 재선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비즈니스’ 차원은 넘어섰다고 봐야 할 상황이다.

다음 회동의 일정도 잡지 않은 채 먼저 판을 깬 미국의 속셈과 진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우리 정부 내 외교안보 역량이 총동원돼야 할 것이다. ‘일본에도 4배 인상을 요구했다’는 등의 보도를 보면 “혈맹인 미국이 한국에 한꺼번에 5배씩이나 증액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식의 울분이나 다분히 선동적인 ‘동맹 무용론’을 펼 때가 아니다.

우방 간, 동맹 간에도 ‘협상이라는 이름의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다. 국익을 지키는 게 총포보다 국가 간 협상과 협정이다. 양자 간이든 다자 협상이든 마찬가지다. 장기화된 미·중 통상무역 갈등이 그렇고, 교착화된 한·일 관계도 다르지 않다. 방위비 분담을 협의하면서 협상 중단이라는 ‘극약처방’으로 최대 압박을 노골화한 미국도 그런 틀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EU 간 농산물 관세 갈등도 우방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 같은 협상이다.

외교안보와 통상무역에서 우리의 대외 협상력은 어느 정도인가. ‘수출규제’에 지소미아 문제를 자충수처럼 끌어들인 것이나, 중국의 ‘사드보복’에 지레 ‘3불(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동맹,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참여 않겠다) 정책’을 약속해버린 것은 국제적으로도 아마추어 외교 사례로 남을 수 있다. 협상학의 기본이라도 안다면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거나, 수시로 변하는 여론에 편승해 정부 입장을 정하거나, 대외관계에서 ‘죽창, 의병’ 운운하는 어이없는 일에 고위 공직자들이 앞장서지는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벼랑 끝에서 자기 이익을 관철해온 북한의 협상술을 배워야 할 판이다.

지금 정부에 미국통, 중국통이 있는가. 통상 전문가와 협상전략 전문그룹은 있는가. 여야 원내대표들이 방위비 문제로 미국으로 성급히 떠났지만 협상가가 없고 외교 전문가가 안 보이기는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가 아젠다는 선명치 못하고, 외교안보 문제로 국내 갈등이나 심화되고 있으니 전문가 그룹이 육성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정은보 방위비분담대사의 향후 대응은 지켜봐야겠지만, 외교안보 지형이 이처럼 복잡한 시기에 공직 30년을 경제금융 관료로 지낸 그를 수석대표로 내세운 채 수조원짜리 협상을 잘 마무리지을 수 있을까. 주한미군까지 흥정 대상처럼 된 한·미 동맹의 현주소와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 행보까지 본다면 일회성 ‘돈 협상’이 아니다. 전략을 세우고 전문가들을 키울 곳은 현안이 산적한 대일, 대중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총칼 없는 전쟁인 국가 간 협상을 너무 쉽게 여기는 건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1월 21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대외 협상력이 국가 이익 크게 좌우
안보와 경제는 뗄 수 없는 게 현실
감정적 대응·여론 선동은 안될 일


[한경 사설 깊이 읽기] 외교·통상 등 전문가 육성해 대외협상력 키워야죠
과거 자유무역, 시장개방에 앞장섰던 미국이 관세·무역 분쟁을 주도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뒤늦게 가입한 중국이 오히려 ‘자유공정무역’을 외치고, 러시아 등 브릭스 국가들이 이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세계는 말 그대로 급변하고 있다.

총칼·함포를 대신한 협상과 협정에 따라 국가의 일상적 이익이 왔다갔다 하는 시대가 됐다. 이것 역시 개방이 확대되고, 국가 간 투자 교역이 늘어난 결과임이 분명하다. 과거와 같은 무력충돌 대신 관세, 투자조약, 경제적 교류 등으로 이해관계를 꼼꼼하게 따지고 정밀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대규모 희생이 뒤따를 수 있는 무력충돌보다는 이성적·합리적 선택이지만, 이 또한 후폭풍이 만만찮다. 뒷감당이 큰 탓에 많은 나라들이 대외 협상에 국가적 총력을 다 한다. 안보와 경제적 이익이 함께 움직이는 것도 현대 외교의 특징이다. 대다수 나라가 장기 발전과 국가 존립을 묶어서 외교안보 전략을 세우면서 협상 전문가를 키우는 이유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 대표들이 크게 밀리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동맹의 틀을 잘 유지하면서 우리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동북아 안보지형이라는 ‘숲’과 분담금 내역에 대한 ‘나무’를 함께 봐야 합리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중요하다고 이런 일이 단시일 내에 갑자기 가능한 일도 아니다. 꾸준히 전략을 다듬고, 더 열심히 전문가를 길러내야 하는 이유다.

국가 간 분쟁이라지만 많은 경우 기업 간의 다툼인 경우도 많다. 다국적 기업이나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금융회사 등은 법률전문가 등 국제적인 자문 그룹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비용도 만만찮다고 한다. 비용으로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국가적 분쟁’도 적지 않다.

기업이 앞장서고, 활발한 시장제도로 개인들의 경제적 성취도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외교안보, 통상무역 같은 대외관계에서 특히 그렇다. 개방될수록, 자유무역이 늘어날수록 국가 간 분쟁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갈등의 내용도 복잡해지는 게 현대 국제사회의 역설이다. 감정적 대응이나 여론 선동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잘 훈련된 전문가들이 나서 총칼 없는 전쟁의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국가 아젠다를 분명히 하고 전문가를 체계 있게 키워야 한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