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 전반에 오진·오판 많다" 지적에 귀 기울여야
‘우리 경제가 2017년 9월을 정점으로 24개월째 하강하고 있다’는 정부의 공식 경기 진단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시작 4개월 만에 경기가 내리막을 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판단을 가장 먼저, 가장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곳은 정부 스스로다. 정부는 온갖 경제지표가 보여준 적신호와 산업현장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불황이라는 경고나 위기에 맞게 대처하라는 요구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았다.
통계청 국가통계위원회의 경기 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정부가 경기순환을 판정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11번째 순환기인 이번이 가장 긴 하강기가 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1996년 3월부터 29개월간 하락기가 있었지만, 지금 상황을 볼 때 5개월 안에 경기가 반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번 장기 하강은 잘못된 정책이 부채질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2년 새 29% 오른 최저임금, 세계 흐름과 반대로 간 법인세 인상 등 증세, 무리한 근로시간 단축, 여덟 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법안 등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킨 정책은 한둘이 아니다. 그 결과 재정 확대, 금리 조정이라는 단기 대응책으로는 어려운 불황에 빠졌다.
근본 문제는 국정 전반에 오진(誤診)이나 오판(誤判)이 많다는 사실이다. 경기 진단만이 아니다. 선거 공약에 매달린 정책은 ‘소득주도성장’ 등 일련의 경제정책 외에도 많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수월성을 부정하는 정책이 압도한다. 자율형 사립고 폐지나 초·중·고 학생들 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둘러싼 혼선도 그런 사례다. 미래사회를 이끌 인재를 키워나가야 할 학교 교육에 대한 전제와 기본 인식에서의 오류가 한국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지진아로 만들고 있다.
안전에 대한 오해와 편향된 시각에서 비롯된 탈(脫)원전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탈원전 정책의 후유증은 국가에너지의 백년대계를 뒤흔들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면서도 지난주 정부는 관련 기업들을 불러 원전수출전략협의회라는 것을 열었다. 해외에서는 이를 어떻게 볼까. 현저히 약해진 대북 도발 억제력과 한·미 동맹관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같은 ‘불통 정책’도 마찬가지다. 상황 진단이 잘못되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면서 처방(대응책)도 엉터리가 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양극화 해소 차원이라는 약자 지원도 그렇다. 임금과 고용관계, 가격과 사적계약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정책이 격차를 키우는 원인인데, 결과인 격차를 원인으로 여겨 엉터리 정책을 고수하는 식은 곤란하다.
전문가들 진단, 쓴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경제 문제로 보면 지금은 재정 동원 같은 단기 대책보다 구조개혁과 생산성 제고라는 근본·장기 대책에 주력할 때다. 물론 노동개혁, 한계산업 구조조정, 교육과 공공의 변혁 같은 과제는 어떤 정부에도 힘든 일이다. 내년에는 총선도 있어 더욱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대로 가면 L자형의 장기 침체가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새겨들어야 한다. ‘D(디플레이션)의 공포’ 같은 경고가 현실화되면 정책을 전환해도 의미가 없어진다. 시간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9월 23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정부 오판 많다" 전문가 지적
정책 담당자들은 귀 기울여야
통계의 독립성도 더 강화돼야
반복된 경기 논쟁이 정부에 의해 일단락되게 됐다. 통계청의 공식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이래서 ‘통계 행정의 독립’ ‘국가 통계 업무의 중립·불간섭’은 중요하다. 선거가 이어지는 한 어떤 정권이든 통계에 간섭하고 싶은 게 생리다. 통계를 조금 손대면 (정책을 잘해서) 국민 삶이 나아지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고, 산업 활동이 정상적으로 계속되는 것처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권에 불리한 통계는 아예 작성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파적 이익에 부합하는 지표도 생성해낼 수 있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통계를 국가와 행정의 기본 인프라로 잘 육성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정책을 펼 상황인가 하는 차원에서 정확한 경기진단은 중요하다. 팽창·확장기에 맞는 정책이 있고, 수축·하강기에 필요한 정책이 있다. 호황 때 불황기 대책이 맞지 않는 것처럼, 불황 국면에서 활황기의 정책을 펴 역주행한다면 불황을 부채질할 뿐이다. 가령 증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강행 같은 근로시간 단축, 기업규제 강화 등은 시장을 위축시키거나 기업 활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게 때문에 침체 국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경기를 살려놓고 시장이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때로는 과열 국면의 거품을 자연스럽게 빼는 방안으로 고려해볼 만한 정책인 것이다. 엔진에 연료를 더 부어야 할 상황에서 과열을 식힐 때나 맞는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문재인 정부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이 그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경기진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탓이든, 의도적으로 판단을 미뤘든 결과는 비슷하게 됐다. 상황진단을 정확하게 하자는 제안이나 건건한 비판에 정부가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은 탓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민간연구소 등 국내의 시각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그런 분석과 충고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데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불황의 골은 한층 깊어졌다. 이제라도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로 장기불황에 빠져 남미나 일부 남유럽 국가처럼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우리 경제가 2017년 9월을 정점으로 24개월째 하강하고 있다’는 정부의 공식 경기 진단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시작 4개월 만에 경기가 내리막을 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판단을 가장 먼저, 가장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곳은 정부 스스로다. 정부는 온갖 경제지표가 보여준 적신호와 산업현장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불황이라는 경고나 위기에 맞게 대처하라는 요구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았다.
통계청 국가통계위원회의 경기 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정부가 경기순환을 판정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11번째 순환기인 이번이 가장 긴 하강기가 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1996년 3월부터 29개월간 하락기가 있었지만, 지금 상황을 볼 때 5개월 안에 경기가 반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번 장기 하강은 잘못된 정책이 부채질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2년 새 29% 오른 최저임금, 세계 흐름과 반대로 간 법인세 인상 등 증세, 무리한 근로시간 단축, 여덟 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법안 등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킨 정책은 한둘이 아니다. 그 결과 재정 확대, 금리 조정이라는 단기 대응책으로는 어려운 불황에 빠졌다.
근본 문제는 국정 전반에 오진(誤診)이나 오판(誤判)이 많다는 사실이다. 경기 진단만이 아니다. 선거 공약에 매달린 정책은 ‘소득주도성장’ 등 일련의 경제정책 외에도 많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수월성을 부정하는 정책이 압도한다. 자율형 사립고 폐지나 초·중·고 학생들 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둘러싼 혼선도 그런 사례다. 미래사회를 이끌 인재를 키워나가야 할 학교 교육에 대한 전제와 기본 인식에서의 오류가 한국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지진아로 만들고 있다.
안전에 대한 오해와 편향된 시각에서 비롯된 탈(脫)원전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탈원전 정책의 후유증은 국가에너지의 백년대계를 뒤흔들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면서도 지난주 정부는 관련 기업들을 불러 원전수출전략협의회라는 것을 열었다. 해외에서는 이를 어떻게 볼까. 현저히 약해진 대북 도발 억제력과 한·미 동맹관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같은 ‘불통 정책’도 마찬가지다. 상황 진단이 잘못되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면서 처방(대응책)도 엉터리가 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양극화 해소 차원이라는 약자 지원도 그렇다. 임금과 고용관계, 가격과 사적계약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정책이 격차를 키우는 원인인데, 결과인 격차를 원인으로 여겨 엉터리 정책을 고수하는 식은 곤란하다.
전문가들 진단, 쓴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경제 문제로 보면 지금은 재정 동원 같은 단기 대책보다 구조개혁과 생산성 제고라는 근본·장기 대책에 주력할 때다. 물론 노동개혁, 한계산업 구조조정, 교육과 공공의 변혁 같은 과제는 어떤 정부에도 힘든 일이다. 내년에는 총선도 있어 더욱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대로 가면 L자형의 장기 침체가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새겨들어야 한다. ‘D(디플레이션)의 공포’ 같은 경고가 현실화되면 정책을 전환해도 의미가 없어진다. 시간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9월 23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정부 오판 많다" 전문가 지적
정책 담당자들은 귀 기울여야
통계의 독립성도 더 강화돼야
반복된 경기 논쟁이 정부에 의해 일단락되게 됐다. 통계청의 공식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이래서 ‘통계 행정의 독립’ ‘국가 통계 업무의 중립·불간섭’은 중요하다. 선거가 이어지는 한 어떤 정권이든 통계에 간섭하고 싶은 게 생리다. 통계를 조금 손대면 (정책을 잘해서) 국민 삶이 나아지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고, 산업 활동이 정상적으로 계속되는 것처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권에 불리한 통계는 아예 작성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파적 이익에 부합하는 지표도 생성해낼 수 있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통계를 국가와 행정의 기본 인프라로 잘 육성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정책을 펼 상황인가 하는 차원에서 정확한 경기진단은 중요하다. 팽창·확장기에 맞는 정책이 있고, 수축·하강기에 필요한 정책이 있다. 호황 때 불황기 대책이 맞지 않는 것처럼, 불황 국면에서 활황기의 정책을 펴 역주행한다면 불황을 부채질할 뿐이다. 가령 증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강행 같은 근로시간 단축, 기업규제 강화 등은 시장을 위축시키거나 기업 활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게 때문에 침체 국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경기를 살려놓고 시장이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때로는 과열 국면의 거품을 자연스럽게 빼는 방안으로 고려해볼 만한 정책인 것이다. 엔진에 연료를 더 부어야 할 상황에서 과열을 식힐 때나 맞는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문재인 정부 이후 일련의 경제정책이 그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경기진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탓이든, 의도적으로 판단을 미뤘든 결과는 비슷하게 됐다. 상황진단을 정확하게 하자는 제안이나 건건한 비판에 정부가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은 탓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민간연구소 등 국내의 시각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그런 분석과 충고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데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불황의 골은 한층 깊어졌다. 이제라도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로 장기불황에 빠져 남미나 일부 남유럽 국가처럼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