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24) 고려의 농촌경제 (하)
고려의 백성은 농업 소출의 절반 또는 4분의 1을 조세로 상납했다. 이외에 비단, 마포, 실, 인삼 등 지역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철과 소금을 바치는 촌이 있었다. 소(所)라고 했는데, 전국에 대략 270군데였다. 이런 연고로 고려인들은 자급적 생존 경제의 벼랑에 놓였다.교역은 물물교환
그에 관해 송의 서긍(徐兢)은 주요 생산물이 거의 다 조세와 공물로 들어가 상인들은 멀리 다니지 않고 하루 거리의 도시로 가서 있고 없는 것을 바꾸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기록했다. 시장이라고 해 봐야 관아가 있는 읍저(邑底)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에 불과했으며, 교역의 형태는 대개 물물교환이었다.
1097년 고려는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비로소 화폐의 편리함을 알게 됐다고 한다. 1101년에는 은 1근(斤)으로 활구(闊口)라 불린 은병(銀甁)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듬해에는 최초로 동전을 주조했는데,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했다. 그때 개경의 좌우에 주점을 설치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일으켰다. 농촌경제의 사정은 달랐다. 농촌에도 주점을 세워 동전의 유통을 장려했으나 실패했다. 고려의 농촌에서 교역은 화폐를 필요로 할 만큼 규모가 크거나 일상적이지 않았다.
고려 농민은 정호
고려의 농민은 정호(丁戶)라 불린 세대복합체로 존재했다. 대개 8가의 소규모 세대와 8결의 경지가 결합한 친족공동체를 말했다. 그에 관해서는 13~14회 연재에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한 가지를 추가로 소개한다. 1319년 고려는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폐지하고 사심관이 불법으로 끌어모은 인구와 토지를 색출했다. 사심관이란 지방 출신으로서 귀족·관료로 출세한 사람을 중앙정부와의 소통을 돕기 위해 해당 군현의 자문관으로 임명한 것을 말한다. 조사 결과 2360호와 1만9798결의 토지가 사심관에 포섭된 것으로 드러났다. 호당 8.4결이었다.
고려의 가족은 그 구성원리가 중국과 달랐다. 고려가 원에 복속할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원에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가속(家屬)이 포함됐다. 고려는 그들의 송환을 요청했다. 원은 일찍 투항한 사람들의 부모, 처, 자녀를 돌려줬다. 그러자 고려는 형제, 자매, 할아버지, 손자, 시아버지도 가속이므로 그들마저 돌려주기를 요청했다. 그렇게 고려의 가속은 중국과 달리 방계와 처부모를 포함하는 복합적 구성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지적한 대로 고려의 친족은 부계, 모계, 처계의 3변으로 열린 조직이었다. 그 부분집합인 가속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속이라 하지만 단일의 세대는 아니었다. 생산과 공납을 위해 소규모 세대 여덟이 결합한 복합체였다. 고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그 세대복합체를 정호로 편성하고 백성 지배체제의 기초단위로 삼았다.
백정과 양수척
모든 사람이 다 정호에 속하지는 않았다. 친족을 결여하고 토지가 조금뿐인 세대가 있었는데, 백정(白丁)이라 했다. 백(白)은 없다는 뜻이다. 곧 정을 보유하지 않은 하층 농민이 백정이었다. 그들은 품팔이하는 처지이지만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어떻든 정호와 백정은 고려의 백성으로서 호적에 등록됐다. 그에 비해 양수척(楊水尺)이란 집단이 있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사냥과 고리짝 만들기를 생업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고려는 양수척을 이류(異類)로, 곧 다른 종족으로 간주했다. 1216년 거란이 침입하자 양수척은 고려를 배반하고 거란에 길 안내를 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세종은 이들의 이동을 금하고 강제로 정착시켰다. 그러고선 신백정(新白丁)으로 불렀다. 그 수효가 적지 않아 전라도 남원의 경우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했다. 이후 신백정은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소굴을 이뤘다. 고려왕조는 우리가 생각해온 만큼 균질적으로 통합된 사회가 아니었다.
기억해주세요
1101년에는 은 1근(斤)으로 활구(闊口)라 불린 은병(銀甁)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듬해에는 최초로 동전을 주조했는데,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했다. 그때 개경의 좌우에 주점을 설치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일으켰다. 농촌경제의 사정은 달랐다. 농촌에도 주점을 세워 동전의 유통을 장려했으나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