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23) 고려의 농촌경제 (상)
1024년 석가탑의 수리과정과 시주문을 기록한 문서.
1024년 석가탑의 수리과정과 시주문을 기록한 문서.
고려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고려사>에 전하지 않는다. 그런 정보가 고려왕조 실록에 있었다면 15세기 전반에 쓰인 <고려사> 편찬자들이 놓쳤을 리 없다. 456년이나 지속한 왕조가 인구에 관한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신기한 일이다.

고려 인구는 얼마인고?

고려왕조가 원(元)제국에 복속했을 때 일이다. 원 황제가 고려 사신에게 고려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보고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고려 사신이 재치 있게 되묻기를 머리털과도 같이 많은 사람의 수를 어찌 헤아릴 수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황제가 웃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한다. 고려가 인구 정보를 국가의 1급 비밀이라서 숨기기 위해 벌인 촌극은 아니었다. 바칠 만한 장부와 통계 자체가 없었다.

이후 고려는 원의 지시에 따라 중국식으로 인구조사를 강행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고려왕조는 끝내 백성의 총수에 관한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원이 1345년 편찬한 <송사(宋史)>에 고려 인구가 210만 명이란 기사가 전한다. 아마도 위와 같은 경과로 원이 알게 된 대강의 수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에 근거해 고려사 연구를 대표하는 박용운 교수는 원이 고려를 침공하기 이전인 12세기의 인구를 250만∼300만 명으로 추산했다.

고려왕조의 토지에 대한 정보는 왕조가 문을 닫기 4년 전인 1388년의 것이 겨우 전한다. 이에 의하면 전국의 경지는 총 50만 결(結)이었다. 1결의 면적은 대략 1헥타르(ha)였다. 소규모 가족의 경지는 보통 1결이었다. 12세기의 인구가 250만∼300만 명이고, 소규모 가족의 구성원이 5∼6명이면, 소규모 가족의 총수는 50만 명이어서 전국의 경지가 50만 결로 추산되는데, 묘하게도 1388년의 정보와 일치한다. 이런 관계에서 12세기 고려 인구와 경지를 250만∼300만 명과 50만 결로 어림잡을 수 있다. 참고로 1910년의 인구와 토지를 소개하면, 1600만 명과 430만ha다. 경제사를 연구함에는 이 같은 거시 지표를 전제하면서 각 시대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하다고 아무런 상상을 하지 않으면 엉뚱한 환상이 그를 대신하고 만다.

조세는 쌀을 기준으로

토지의 생산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992년에 제정된 조세 수취 규정에서 발견된다. 당시 토지는 1년 1작, 2년 1작, 3년 1작의 세 등급으로 구분됐다. 경작 기간과 회수를 고려한 논 1결의 연평균 생산성은 벼 12.5석이었다. 자세한 계산 과정을 생략하고 2015년 논농사 생산성과 비교하면 50분의 1 수준이다. 농사라고는 하지만 토지가 제공하는 작물 생육의 에너지를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휴한농법(休閑農法)의 단계였다. 지력을 인공으로 보충하는 비료의 사용은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조세의 품목이 벼라고 해서 쌀이 고려인의 주식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쌀은 소수 지배 신분의 주식이었으며, 다수 서민의 주식은 조·수수 등 밭작물이었다. 조세가 쌀로 수취된 것은 지배 신분의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밭의 조세도 쌀로 거뒀는데 마찬가지 목적에서였다. 밭작물 가치는 쌀의 절반으로 평가됐다. 예컨대 콩 2석을 낼 것을 벼 1석으로 대신했다. 1024년 불국사는 지진으로 훼손된 석가탑을 수리했다. 그때 불국사 내외의 승(僧) 80여 명이 각종 곡물과 기물을 시주했다. 곡물은 쌀, 밀, 메밀, 콩, 팥, 완두 등 도합 29석8승이었다. 그 가운데 쌀은 6석9두8승으로 23%에 불과했다. 80여 명 가운데는 왕조로부터 수조지(收租地)를 받는 대덕(大德)이 11명 있었는데, 쌀을 시주한 사람은 주로 그들이었다. 여기서도 쌀은 상층의 귀족·관료가 아니고서는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식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말 신라촌장적의 시대에 비해 인구가 2∼3배나 증가한 시대였다. 그 사이 8∼9세기에는 인공관개가 발달하고 대형 쟁기가 보급되는 등 일종의 농업혁명이 일었다. 여전히 낮은 수준의 농법이지만 고려 농촌의 생태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1145년 고려왕조는 전답으로 일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잡종지에 뽕나무,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달리 말해 개간할 만한 토지는 이미 거의 개간된 상태였다. 이로부터 뽕나무 숲이 무성했던 7세기 말의 생태환경과는 크게 달라진, 산업의 중심이 현저히 곡작 농업으로 이동한 10∼12세기 고려의 농촌경제를 상상할 수 있다.

■기억해주세요

12세기 고려 인구는 250만~300만명으로 추정…지배층 주식은 쌀, 서민은 조·수수같은 밭작물이었죠
1145년 고려왕조는 전답으로 일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잡종지에 뽕나무,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달리 말해 개간할 만한 토지는 이미 거의 개간된 상태였다. 이로부터 뽕나무 숲이 무성했던 7세기 말의 생태환경과는 크게 달라진, 산업의 중심이 현저히 곡작 농업으로 이동한 10∼12세기 고려의 농촌경제를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