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20) 바다의 신라인 (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세워졌다.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세워졌다.
무역만이 아니었다. 신라인의 대외 진출도 활발했다. 814년 심한 흉작과 잇따른 내란으로 인해 상당수 신라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일본 곳곳에 표착하는 신라인 수가 적지 않았다. 820년 원강(遠江)과 준하(駿河)에 정착한 신라인은 700명이나 됐다.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도 많았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당시 중국으로 이주해 각종 직업에 종사한 신라인에 관한 정보를 풍성히 전하고 있다.

신라인의 대외 진출

838년 엔닌이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그의 옆에는 신라인 출신 통역이 있었다. 중국에 표착한 엔닌 일행은 바닷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명을 고용했다. 바다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에 그들은 숯 운반선을 탄 신라 상인 10명을 만났다. 엔닌 일행이 도착해 머문 곳은 등주에 있는 구당신라소(句唐新羅所)였다. 등주는 오늘날의 산둥반도다. 거기엔 장보고가 세운 적산원(赤山院)이란 절이 있었다. 절에는 30여 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으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농장이 딸려 있었다. 법회가 열리면 250명의 신라인이 참가했다.

엔닌이 의도적으로 그의 행렬에서 이탈해 구법의 순례를 떠난 것은 순전히 적산원의 배려와 주선에 의해서였다. 그가 들른 곳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자치촌이 있었으며, 신라원(新羅院) 또는 신라관(新羅館)이라는 신라인의 행객이 머무는 숙박 시설이 있었다. 당의 수도 장안에는 대략 7~8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다. 엔닌이 만난 신라인 가운데는 상인 출신으로 항해 중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일본에 체류해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도 있었다. 완십삼랑(阮十三郞)과 같이 이름이 일본식인 신라인도 있었다. 완십삼랑의 숙부 이원좌는 종2품의 전중감찰시어사(殿中監察侍御史)였다. 당에서 고관으로 성공한 그는 엔닌이 장안에 체류하는 2년간 그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엔닌의 구법 순례는 신라인의 배려와 주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엔닌이 어렵사리 구한 귀국선도 신라 상인의 배였다. 9세기 당에 거주한 신라인은 신라와 일본을 무시로 왕복한 국제 상인이자 신실한 불도로서 국적 따위는 알지 못하는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이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737년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의 현종 황제는 신라의 성덕왕을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임명해 해적을 제압하고 해상교역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 신라의 강한 해군력이 그 배경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라 배는 빠르고 풍랑을 견디는 견고함에서 선진적이었다. 신라왕에게 부여된 영해군사의 직은 이후 120년간이나 이어졌다. 828년 신라는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오늘날의 완도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大使)로 임명됐다. 장보고는 서남해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20~30년간 살면서 장군으로 또는 아마도 무역상인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삼국사기》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가 해적이 신라인을 당에 노비로 파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를 승인하고 장보고를 지원한 것은 그의 영해군사직 수행과 연관이 있었다고 보인다. 당도 신라가 그런 목적에서 청해진을 설치하는 것을 납득했다. 그것은 이후 신라가 청해진을 폐지하자 더는 신라왕을 영해군사에 봉하지 않았음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청해진은 해적을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중개하거나 스스로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번성했다. 앞서 소개한 엔닌 일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중국 등주의 적산원에 무역선을 파견해 중국 물품을 매집했다. 장보고는 일본 구주(九州)의 대재부에도 무역선을 보냈는데, 물품의 상당 부분은 중국산이었다. 841년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한동안 권좌를 누리다가 패했다. 이후 851년 청해진은 해체되고 주민은 벽골군으로 옮겨졌다. 청해진의 폐지는 한국사가 바다로부터 멀어지는 중대 계기를 이뤘다. 그렇지만 신라인의 해상 활동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측 기록은 9세기 말까지 신라 해적이 대마도와 서일본 연안을 자주 침범했음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신라 해군이 해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894년 신라 해군은 왕의 명령을 받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대마도를 습격했는데, 그 규모가 선박 100척과 승선원 2500명에 달했다.

신라는 완도에 '청해진' 설치해 중국·일본과 무역했죠…'해상왕' 장보고의 반란으로 해체돼 바다와 멀어졌죠
■기억해주세요

828년 신라는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오늘날의 전남 완도다.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大使)로 임명됐다. 장보고는 서남해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20~30년간 살면서 장군으로 또는 아마도 무역상인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841년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한동안 권좌를 누리다가 패했다. 이후 851년 청해진은 해체되고 주민은 벽골군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