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9) 바다의 신라인 (상)

신라는 바다로 향했다
바다의 군사적 중요성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더욱 높아졌다. 통일의 중대 계기를 이룬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은 당의 우수한 군선(軍船)이었다. 676년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당과의 전쟁은 바다와 연안을 주요 무대로 했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당군이 쳐들어 왔는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치열한 해전이었다. 676년 11월에는 당과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사찬 시득이 병선을 거느리고 설인귀의 당군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대소 22회 전투에서 승리하고 4000명이나 머리를 벴다.
6~9세기 신라는 해양국가
통일 이후 678년 신라는 선부를 병부에서 독립시키고 별도로 관리를 뒀다. 관리의 지위는 최고 관부인 병부 및 조부(調府)와 동급이었으며, 장관급의 영(令) 1인에는 왕족이 임명됐다. 다시 벌어질지 모를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부쩍 강화한 조치였다. 681년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왕은 임종을 맞아서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겠으니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서 장사지내도록 명했다. 바다 건너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경계해서였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의 대왕암이 왕의 수중 무덤이다. 731년 일본의 병선 300척이 신라를 침입했는데, 신라가 이들을 대파했다. 해군을 육성해 온 신라의 국방 정책이 거둔 성과였다.

대외무역의 번성
8~9세기 신라인의 해상 활동은 후대의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활발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냉담했지만, 그것이 양국의 활발한 교역을 막지는 않았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란 관부를 두어 일본과의 무역을 관장했다. 752년 신라는 7척의 배와 700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일본의 수도 내량(奈良)에서 공적 교역을 벌였다. 도중의 교통 요지인 대재부(大宰府)와 난파(難波)에서도 그들을 맞는 시장이 열렸다. 난파와 내량을 잇는 운하는 신라강(新羅江)이었다. 강의 좌우에는 일본 귀족과 사원 전장(田莊)이 포진했다. 그들은 신라강을 오가는 상선을 통해 신라의 물품을 구매했다. 내량의 동대사(東大寺)는 신라강장(新羅江莊)이란 창고를 두어 신라 물품을 저장했다. 일본에서 신라 물품은 서로 구하려고 경쟁한 인기품이었다. 각급 관청과 귀족들이 제출한 구입 신청서가 30여 장 전해 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이 구한 신라 물품은 대개 가볍고 부피가 작은 거울, 향료, 염료 등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대개 원료가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으로 신라가 정밀 가공한 제품이었다. 8~9세기 신라 경제는 동시대의 해상 실크로드와 깊게 연결됐으며, 그러한 국제환경에서 번성했다.

8~9세기 신라인의 해상 활동은 후대의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활발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냉담했지만, 그것이 양국의 활발한 교역을 막지는 않았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란 관부를 두어 일본과의 무역을 관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