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8) 춘추와 문희의 사랑 (하)
1980년대 후반 발굴된 경주 월성 주변의 구지(溝池).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일 수 없는 강력한 근거다.
1980년대 후반 발굴된 경주 월성 주변의 구지(溝池).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일 수 없는 강력한 근거다.
그에 맞서 이종욱 교수는 박창화가 필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본 어딘가에 있을 진서(眞書) 《화랑세기》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화랑도가 충절의 무사라는 이미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것이며, 신라 귀족들의 성생활이 난잡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후대의 윤리기준에 입각한 선입견일 뿐이라고 위서설을 비판했다.

이종옥 교수의 진서설

이 교수가 진서설의 근거로 제시한 여러 가지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경주 월성(月城)의 구지(溝池)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을 옹위한 성이다. 1980년대 후반 월성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월성에는 원래 그것을 둘러싼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는 여러 연못(池)과 그것을 잇는 도랑(溝)의 형태였음이 밝혀졌다. 구지는 8세기 이후 군사적 긴장이 사라짐에 따라 메워졌으며, 이후 1000년 이상 그것이 실재했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월성의 벽 아래 그것이 설치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메워지기 이전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역사 정보다.

2002년 나는 별생각 없이 이 교수가 역주한 《필사본 화랑세기》를 읽었다. 나는 금방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 나오는 ‘노(奴)’, ‘비(婢)’, ‘천(賤)’ 글자의 용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내가 분석한 것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잠시 소개한 대로 삼국인에게 ‘노’라 함은 후대의 노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 내지 공동체 간의 정치군사적 신종관계를 대변했다. 예컨대 읍락의 지배층은 하층 성원을 ‘노’라고 불렀다. 백제왕은 고구려왕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을 ‘노객(奴客)’이라 칭했다. 이런 언어생활은 돌궐을 위시한 중국 주변의 유목 민족에 고유한 것인데, 삼국과 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의 용례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는 귀족에 대비된 평민의 신분을 지적할 때 ‘천’하다고 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와의 관계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노’와 ‘비’의 용례는 10회씩이다. 신라의 화랑도는 낭도→낭두→화랑의 세 계층으로 이뤄졌는데, 낭도는 품(品)이 없는 평민이다. ‘노’의 용례는 일관해 무품의 낭도를 가리켰다. 신라의 귀족 부인은 남편 이외에 평민 출신 젊은 남자와 성생활을 즐겼다. 귀족 부인은 낭도가 그의 내연남일 때 그를 사노(私奴)라고 불렀다. 반면 품을 가진 낭두는 칭노(稱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칭신(稱臣)하거나 그 대상이었다. ‘비’ 용례는 귀족 신분의 여인이 적출(嫡出)이냐 서출(庶出)이냐에 따라 상하 신종하는 관계이거나 낭두의 처들이 화랑도의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 은총을 받는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이렇게 성적 서비스를 통해 상하가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하는 질서를 가리켜 ‘신국(神國)의 도(道)’라고 자부하고 있다. 신라인에게 신라는 ‘신의 나라’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천’ 용례는 9회인데, 《삼국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무품의 평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대남보라는 낭도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딸을 풍월주에게 바쳐 골품을 얻으라고 권했다. 대남보가 거절하면서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하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이 교수의 진서설은 논리와 실증에서 위서설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위서설이 여전히 다수를 점하고 있음은 국사학계의 주류가 공유해온 신라사 인식이 《필사본 화랑세기》의 그것과 너무 달라 진서로 수용할 경우 그 후 유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지 달리 진지한 학술적 근거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교수의 진서설을 지지했다.

“국사학계가 오류를 범한 듯”

그러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필사본 화랑세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사건들을 비교해 봤다. 그 중 하나가 앞서 소개한 춘추와 문희의 이야기다. 오리지널리티는 단연코 《필사본 화랑세기》 쪽이다. 20세기의 어느 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두 역사책의 문맥을 능가하는 이야기를 가짜로 지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귀신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춘추와 문희는 포사에서 혼례를 올렸다. 곧 포석정이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제사나 혼례가 거행된 신전으로 추정된다. 누가 그 천고의 비밀을 미리 알아서 위서에다 그렇게 써 놓았단 말인가. 아무래도 국사학계 주류는 후과(後果)를 감당하기 힘든 집단오류를 범한 듯하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메워진 경주 월성 ‘구지’를 기록, 삼국사기·삼국유사와 달라도 ‘가짜’라는 근거는 없죠”
기억해주세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필사본 화랑세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사건들을 비교해봤다. 그중 하나가 앞서 소개한 춘추와 문희의 이야기다. 오리지널리티는 단연코 《필사본 화랑세기》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