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2) 선사시대의 한반도 (하)
역사적으로 군집→부족→족장사회→국가로 발전…한국의 청동기시대는 '군집'…단군신화와 역사는 달라
송국리유형의 취락은 이전 유형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에는 충남 보령시 관창리의 취락 유적이 가장 큰데, 특정 시점의 주거지가 100기 정도로 추정된다. 경남 진주시 대평리에서는 상이한 시점의 주거지를 합해 모두 350기의 주거지가 발굴됐다. 진주시는 대평리에 청동기문화박물관을 세워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학습차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송국리유형의 취락을 둘러싸고서는 방호시설로 환호(環濠)와 목책(木柵)이 설치됐다. 이는 생활자료를 구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취락 간 긴장이 높아진 시대가 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백질 공급원

취락의 내외에는 분묘지와 경지가 조성됐다. 진주에서 발굴된 논의 규모는 평균 20㎡로, 한 사람으로도 개간과 관개가 가능할 정도의 작은 규모다. 반면 밭의 규모는 훨씬 컸다. 어느 밭은 이랑이 19개인데, 그중 하나는 길이가 123m에 달했다. 인골에서 추출된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그 사람이 평생 섭취한 식료의 종류를 알 수 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후기 인간들은 탄소열량을 주로 도토리나 벼와 같은 야생 식료 채취에 의존했다. 그에 비해 청동기 시대 후기, 곧 송국리유형에서 탄소열량의 주요 공급원은 조, 기장, 수수와 같은 밭작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밭농사가 경제생활의 불가결한 토대를 이룬 것이다.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육상동물과 어패류였다. 수렵과 어로는 여전히 큰 비중의 생산활동을 이뤘다.

송국리유형의 취락은 주거지, 농경지 외에도 공동의 분묘지, 저장시설, 공방(工房), 회의장, 외부와의 교역 장소 등을 보유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같은 구조의 취락을 두고 복합사회(complex society)의 성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취락 공간이 분업적으로 편성된 가운데 인근 취락과 교역했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선 취락을 통합하는 권위나 권력의 작용이 필수적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이 사회가 정치적·착취적·세습적 권력이 아니라 의례적·관리적·획득적 권위에 의해 통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 시대 묘제는 일반적으로 지석묘인데, 그 유적이 호남에서만 1만6000개에 달한다. 지석묘 입지나 부장품 위세에서 취락의 일반 성원으로부터 분리된 권력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힘든 실정이다.

공동취사

청동기 시대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주거지 밖의 야외노지에서 공동취사를 했다. 진주 어은지구 유적에서는 약 30기의 야외노지가 발굴됐다. 유적 크기나 위치로 보아 공동취사 단위는 대략 15~20명이었다. 가락동·역삼동유형이라면 2기의 주거지, 송국리유형이라면 4기의 주거지 결합에 해당한다. 이하 이 공동취사의 단위를 세대(世帶· household)라고 부르고 정의한다. 세대와 가족은 다르다.

세대는 식료, 의료, 기타 생활자료의 취득과 소비의 기초 단위다. 청동기 시대 소규모 가족이나 개별 주거지는 독자 세대가 아니었다. 주거지 밖의 야외노지에서 다른 주거지 사람과 공동취사를 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존재했다는 생각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한 환상이다. 그 같은 역사의 진보는 다음 회에서 설명하듯이 기원후 2~4세기나 돼서야 관찰된다.

부족

세계의 고고학과 인류학은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에 이르는 사회의 발전을 군집(band)→부족(tribe)→족장사회(chiefdom)→국가(state)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군집은 인구 40명 정도 무리를 말한다. 부족은 인구 500명 전후를 표준으로 한다. 주거지가 100기인 송국리유형의 취락이 그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군집→부족→족장사회→국가로 발전…한국의 청동기시대는 '군집'…단군신화와 역사는 달라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전기 가락동·역삼동유형까지만 해도 군집으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 송국리유형에 이르러 부족으로 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철기 시대가 열리면서 서서히 역사 시대의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역사가 반만년이 되도록 유구하다는 단군신화와 고고학적 유적·유물이 이야기하는 실제 역사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해주세요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전기 가락동·역삼동유형까지만 해도 군집으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기 송국리유형에 이르러 부족으로 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철기 시대가 열리면서 서서히 역사 시대의 동이 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