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北비핵화' 걸음도 안 뗐는데 봇물 터진 경협 구상들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위한 대화는 이제 막 시작됐는데, 온갖 대북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봇물 터진 듯 쏟아지고 있다. 장밋빛 청사진에 비용 계산도 없는 게 대부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6월 지방선거에 맞춰 내놓은 공약에는 23개의 대북사업이 들어 있다. 직접적인 경제 사업이 아닌 것도 있지만, 비용이 수반되는 것이 많다.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처럼 정부가 ‘압박카드’로 써야 할 것에서부터 두만강지역 남·북·중·러 공동개발 계획처럼 여러 국가가 뜻을 모아야 시동이 걸릴 사업까지 섞여 있다.
여당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강력한 의지로 정부를 지원하고 국회 차원에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라면 좋다. 하지만 북핵 폐기의 시금석이 될 북·미 정상회담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남북한 간에도 원론적 수준의 ‘비핵화 원칙’에만 합의됐다고 보는 게 냉정한 판단일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물론 중국 일본까지 외교안보 역량을 총동원하는 ‘거대한 체스판’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판에 집권당이 ‘개마고원 관광’ ‘백두산 직항로 개설’ 같은 것까지 ‘희망 공약’처럼 명시한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추진하겠다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하지만 공약 대부분이 아직 유엔의 대북제재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강력한 국제제재 때문에 북한이 대화의 장(場)으로 나왔는데, 한국이 앞서 이 대열에서 벗어나는 듯한 상황이 빚어지면 북핵 폐기는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남북교류 사업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걱정스럽다. 관광 농업 어업 의료 문화 등에 걸쳐 지자체 권한을 넘어서는 프로젝트가 쏟아지고 있다. 중앙정부 차원의 정리가 필요하다.
모두가 ‘김칫국’만 마실 뿐 천문학적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북한 핵포기 대가, 10년간 2조달러(약 2137조원)’라는 포천의 분석을 보면 나라 밖에서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보는 듯해 민망할 정도다. 정부의 올해 남북협력기금은 1조6182억원, 안 그래도 급팽창하는 복지비용에 가시화되는 ‘비핵화 비용’까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감성적 평화론’과 ‘통일 지상주의’가 계속 과도해질까 걱정이다. 여당의 공약도, 지자체들 행보도 너무 가볍지 않은가.
<한국경제신문 5월16일자> 한국의 정당들이 신중하지 못한 채 여론에 편승해 앞서 나가는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안도 사안 나름이다. 수십 년 적대 관계를 끝내자고 이제 겨우 ‘원칙’에 합의한 판에, 더구나 세계 4대 강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북한의 핵무기 폐기 문제에서는 정치권이 앞서 달린다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다. 공당(公黨), 더구나 집권여당이라면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도 알 알아야 한다.
여의도 정치가 가볍게 움직이니 시·도, 시·군 등 지방자치단체도 여기에 가세한다. 서울시 부산시 같은 지자체는 중앙정부 못지않게 덩치는 크지만 남북교류 같은 업무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만큼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늘 중앙 정치 따라 하는 게 지방 정치다. 더구나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닥치자 표를 의식한 ‘통일 포퓰리즘’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6월 선거용으로 내놓은 공약집에 남북관계 개선 공약이 23개나 들어 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보면 이보다 훨씬 많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식이 될까 하는 우려도 크지만, 유엔 주도의 국제 제재가 그대로 있는 판에 당사자인 한국이 앞서 움직임으로써 제재 효과를 무력화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면 곤란하다. 공약 중에는 향후 북한과 핵폐기 대화에서 정부가 ‘협상 카드’로 써야 할 것도 있고, 한국만 하고 싶다고 될 수도 없는 복잡한 사안도 있다. 공약에 포함된 두만강 나선지역 개발만 해도 “이 얘기가 나온 게 언제냐” 할 정도로 오랫동안 말만 무성했던 사업이다.
지자체들이 발표한 대북 ‘희망 사업’은 종류를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수많은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전문가 그룹의 분석을 인용한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의 보도를 보면 독일 통일 후 옛 서독에서 동독으로 유입된 자금은 1조2000억유로가 넘는다. 현재 가치로 1조7000억유로(약 2167조원)에 달한다. 올해 우리 정부 예산(429조원)의 5배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평화와 통일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포천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필요한 돈이 10년간 2조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비용이 들더라도 핵무기가 완전히 폐기되고 남북 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된다면 쓸 수도 있는 돈이다. 무력충돌의 위협이 줄어들면 당장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계산도, 재원 동원 방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장밋빛 청사진만 경쟁적으로 내놓는 현실이다. 자칫 잘못되면, 평화는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비핵화 비용’만 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경제는 큰 부담을 진다. 정부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쏠림 현상을 막고, 성급한 환상론을 경계하면서, 냉정하게 가야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위한 대화는 이제 막 시작됐는데, 온갖 대북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봇물 터진 듯 쏟아지고 있다. 장밋빛 청사진에 비용 계산도 없는 게 대부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6월 지방선거에 맞춰 내놓은 공약에는 23개의 대북사업이 들어 있다. 직접적인 경제 사업이 아닌 것도 있지만, 비용이 수반되는 것이 많다.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처럼 정부가 ‘압박카드’로 써야 할 것에서부터 두만강지역 남·북·중·러 공동개발 계획처럼 여러 국가가 뜻을 모아야 시동이 걸릴 사업까지 섞여 있다.
여당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강력한 의지로 정부를 지원하고 국회 차원에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라면 좋다. 하지만 북핵 폐기의 시금석이 될 북·미 정상회담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남북한 간에도 원론적 수준의 ‘비핵화 원칙’에만 합의됐다고 보는 게 냉정한 판단일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물론 중국 일본까지 외교안보 역량을 총동원하는 ‘거대한 체스판’이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판에 집권당이 ‘개마고원 관광’ ‘백두산 직항로 개설’ 같은 것까지 ‘희망 공약’처럼 명시한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추진하겠다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하지만 공약 대부분이 아직 유엔의 대북제재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강력한 국제제재 때문에 북한이 대화의 장(場)으로 나왔는데, 한국이 앞서 이 대열에서 벗어나는 듯한 상황이 빚어지면 북핵 폐기는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남북교류 사업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걱정스럽다. 관광 농업 어업 의료 문화 등에 걸쳐 지자체 권한을 넘어서는 프로젝트가 쏟아지고 있다. 중앙정부 차원의 정리가 필요하다.
모두가 ‘김칫국’만 마실 뿐 천문학적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북한 핵포기 대가, 10년간 2조달러(약 2137조원)’라는 포천의 분석을 보면 나라 밖에서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보는 듯해 민망할 정도다. 정부의 올해 남북협력기금은 1조6182억원, 안 그래도 급팽창하는 복지비용에 가시화되는 ‘비핵화 비용’까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감성적 평화론’과 ‘통일 지상주의’가 계속 과도해질까 걱정이다. 여당의 공약도, 지자체들 행보도 너무 가볍지 않은가.
<한국경제신문 5월16일자> 한국의 정당들이 신중하지 못한 채 여론에 편승해 앞서 나가는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하지만 사안도 사안 나름이다. 수십 년 적대 관계를 끝내자고 이제 겨우 ‘원칙’에 합의한 판에, 더구나 세계 4대 강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북한의 핵무기 폐기 문제에서는 정치권이 앞서 달린다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다. 공당(公黨), 더구나 집권여당이라면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도 알 알아야 한다.
여의도 정치가 가볍게 움직이니 시·도, 시·군 등 지방자치단체도 여기에 가세한다. 서울시 부산시 같은 지자체는 중앙정부 못지않게 덩치는 크지만 남북교류 같은 업무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만큼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늘 중앙 정치 따라 하는 게 지방 정치다. 더구나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닥치자 표를 의식한 ‘통일 포퓰리즘’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6월 선거용으로 내놓은 공약집에 남북관계 개선 공약이 23개나 들어 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보면 이보다 훨씬 많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식이 될까 하는 우려도 크지만, 유엔 주도의 국제 제재가 그대로 있는 판에 당사자인 한국이 앞서 움직임으로써 제재 효과를 무력화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리면 곤란하다. 공약 중에는 향후 북한과 핵폐기 대화에서 정부가 ‘협상 카드’로 써야 할 것도 있고, 한국만 하고 싶다고 될 수도 없는 복잡한 사안도 있다. 공약에 포함된 두만강 나선지역 개발만 해도 “이 얘기가 나온 게 언제냐” 할 정도로 오랫동안 말만 무성했던 사업이다.
지자체들이 발표한 대북 ‘희망 사업’은 종류를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수많은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전문가 그룹의 분석을 인용한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의 보도를 보면 독일 통일 후 옛 서독에서 동독으로 유입된 자금은 1조2000억유로가 넘는다. 현재 가치로 1조7000억유로(약 2167조원)에 달한다. 올해 우리 정부 예산(429조원)의 5배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평화와 통일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포천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필요한 돈이 10년간 2조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비용이 들더라도 핵무기가 완전히 폐기되고 남북 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된다면 쓸 수도 있는 돈이다. 무력충돌의 위협이 줄어들면 당장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계산도, 재원 동원 방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장밋빛 청사진만 경쟁적으로 내놓는 현실이다. 자칫 잘못되면, 평화는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비핵화 비용’만 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경제는 큰 부담을 진다. 정부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쏠림 현상을 막고, 성급한 환상론을 경계하면서, 냉정하게 가야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