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토대 만들어
정치적으론 장기집권 따른 비판 늘 따라다녀
정치적으론 장기집권 따른 비판 늘 따라다녀

경제개발계획··· 연 10%씩 성장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룬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경제 개발이다. 1960년대 초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못 살았던 한국(1인당 국민소득 70달러대)이 오늘날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 무역(수출+수입) 규모 세계 8위, 외환보유액 세계 9위, 20K-50M(1인당 소득 2만달러+인구 5000만 명) 클럽 일곱 번째 가입’ 국가로 바뀐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개발 덕분이다.
박정희는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국가재건최고위원으로 실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모든 여건이 최악이었다. 축적된 자본이 전혀 없었다. 이렇다 할 기업도 없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못사는 나라였다. 박정희는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와 물건을 만들고 해외로 내다파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독일과 미국에 갔다. 정부가 주도했고 ‘대외 지향적 수출산업 구조’가 태동했다. 우리는 처음에 가발과 쥐를 잡아 털(코리안 밍크)을 팔았다. 섬유 합판 신발 등 경공업 제품도 만들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들여온 자금을 낮은 이자로 빌려주는 정책금융을 통해 수출기업을 육성한 이유다.
민간기업 내세운 게 ‘비결’
![[이슈&이슈] 11월14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엇갈리는 평가](https://img.hankyung.com/photo/201711/01.15179164.1.jpg)
이런 경제성장에 대해 비판자들은 놀라운 성과가 아니라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난 직후 독립한 나라 중 경제 기적을 이뤄 신흥공업국이 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점을 볼 때 이런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국가가 특정 기업을 지원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빌려온 자본을 특정 민간기업에 지원해 키울 수밖에 없었다는 측면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국가가 계획을 짜고 특정 산업을 민간기업에 맡긴 것이 박정희 경제의 성공비결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소련이라는 나라(현재 러시아)는 민간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집중화해 실패했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다. 우리나라는 농업국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박 대통령이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가난한 농업국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16년 장기집권 ‘부정적 평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정치 부문에 많다. 16년의 장기집권은 늘 비판 대상이다. 박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경제개발을 위해선 개발독재가 필요했다”고 설명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각에서 볼 때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1972년 유신헌법으로 개헌한 것도 비판 대상이다. 이를 통해 직접선거로 뽑던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이라는 간접선거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8대와 9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됐고 장기집권으로 치달았다.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오일쇼크 등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때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다고 하지만 평가는 부정적이다. 집권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야당과 학생 운동을 탄압한 것도 비판을 받는다.
◆관점
오늘날 우리는 박정희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까? 나라와 문명마다 큰 분기점이 존재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전과 이후의 문명 세계는 달라졌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분기점이다. 마르틴 루터 이전과 이후 역시 그렇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는 종교 역사를 바꿔놓았다. 메이지 유신 이전과 이후의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박정희 이전과 이후의 한국도 그렇다. 박정희 이전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으나 박정희 이후의 한국은 단군 이래 가장 부강한 나라로 변했다. 박정희 이전과 이후를 동영상 흐름으로 봐야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고기완 한경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