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9) 유한양행
유한양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가운데 하나다. 규모가 크지 않음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는 설립자 유일한의 경영이념 때문이다. 유일한은 평생 동안 이룬 기업과 재산을 사회에 내놓았다. 기업의 경영권은 임직원들에게 주었고 후손들은 회사일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9) 유한양행
![유한양행 본사](https://img.hankyung.com/photo/201703/AA.13552095.1.jpg)
창업자 유일한 씨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안티푸라민을 개발했어요. 또 당시엔 생소했던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어요.
홀로 미국 갔다가 돈을 도둑맞았는데
![유일한](https://img.hankyung.com/photo/201703/AA.13552088.1.jpg)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유일한의 미국 생활은 아주 어릴적부터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는 유일한의 나이 아홉 살에 홀로 미국으로 떠나보낸다. 그런데 아뿔싸. 배를 타고 미국을 가는 도중 부모가 준 돈을 모두 도둑맞았다. 빈털터리로 미국 땅에 내린 소년 유일한을 미국인 자매가 양자로 입양해서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워줬다.
그는 완전한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미시간대학을 다닐 때 미식축구 선수를 했을 정도였고, 졸업한 뒤 GE에 취직해서 승진도 매우 빨랐다. 직장을 나와 사업을 시작한 곳도 미국이었다. 사업 아이템은 숙주나물 장사였다. 중국인들이 숙주나물을 좋아하는데 당시 미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유일한의 숙주나물 사업은 크게 번창했다.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결혼도 중국계 미국인 호미리 씨와 하게 된다. 1925년, 즉 30세 때의 일이다.
녹두 구하러 중국 갔다가 의료사업 눈떠
1926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하러 중국에 왔다가 친부모를 만나러 간도 지방에 들르게 되었다. 유일한은 거기서 조선인 동포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도 미국에서 숙주장사나 할 생각 말고 조국을 위해서 ‘큰 일’을 하라고 종용했다. 유일한은 조국을 위한 사업을 하며 남은 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계 미국인 의사였던 서재필 선생(독립신문 창간자)의 조언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조선의 동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의약품이라고 생각했다. 숙주사업을 정리해서 만든 50만달러로 의약품을 구입해서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왔다.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했다. 서구식 제약회사는 5000년 한민족 역사에서 유한양행이 처음이었다. 유일한이 사들고 온 약품들은 당시 최첨단의 것들이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해냈다. 외국 약을 수입해서 파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신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도 많이 쓰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다.
유일한의 경영은 정직을 신조로 했다. 당시의 조선에는 탈세가 만연했지만 유한양행은 법대로 세금을 납부했다. 광고도 정직하게 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과장광고 대신 있는 그대로의 효능을 알렸다. 이런 태도는 당시의 어떤 한국인과도 달랐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양어머니의 청교도적 삶이 몸에 배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한의 그런 태도는 해방 후에도 이어져서 정치자금을 하나도 내지 않은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식 경영이 아닌 미국식 경영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https://img.hankyung.com/photo/201703/AA.13117834.1.jpg)
노년에 건강이 안 좋던 유일한은 1971년 세상을 떠났다.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회사였지만 거의 모든 주식을 유한재단에 증여하고 자식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경영권은 전문경영인 조권순 전무에게 넘겼다. 그 후 45년 동안 유한양행은 대주주가 없는 전문경영인 기업으로 잘 유지되어 오고 있다.
초기의 우리나라 기업가는 대부분 일본 기업들로부터 사업을 배웠다. 볼 수 있는 것이 일본인 기업뿐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처음으로 미국식의 경영을 시도해서 성공한 기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