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5) 김철호 ‘기아자동차’를 세우다
현재의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지만 1997년 이전까지는 독립된 자동차 기업이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래의 기아차를 세우고 성공시킨 김철호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 가서 사업을 배우고 돈을 벌어 한국에 기업을 일으킨 청년의 이야기다.
(5) 김철호 ‘기아자동차’를 세우다

우리와 함께 있는 삼천리 자전거와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역추적하면 1922년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운 한 젊은이의 꿈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기회’를 찾다

1922년, 김철호도 17세의 나이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우여곡절 끝에 삼화제작소라는 철공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볼트와 너트를 만드는 직원 열 명의 작은 직장이었다. 성실히 일한 덕분에 4년 만에 그 회사의 지배인이 됐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하던 시절임을 생각해봤을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3000리호 자전거’를 아시나요?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7살 때 일본 철공소에 취직…지배인 승진, 자전거 거쳐 '소하리' 기아자동차 공장 만들어](https://img.hankyung.com/photo/201702/AA.13340766.1.jpg)
1943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나니 500만엔이 됐다. 요즈음 돈으로는 1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김철호는 1944년 귀국해 영등포에 경성정공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다음해부터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쓰던 장비들도 옮겨 왔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지만 생산을 중단할 수 없었다. 직원들을 설득해 기계설비들을 뜯어 부산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부산 피란지에서 한국 최초의 완제품 자전거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자전거 이름은 3000리호로 붙이고 회사 이름은 기아산업으로 바꾼다. 그때의 이름 기아는 기아자동차가 됐고, 3000리 자전거는 지금의 삼천리자전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꺼져 가고 있었다. 공장 건설 중에도 많은 시간을 그는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1973년 11월22일 김철호는 눈을 감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김철호의 유언이었다. 비행기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동차의 꿈은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엔진을 배워 오라고 일본에 파견한 김선홍 차장은 8년 후 기아차의 최고경영자인 회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