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박사의'그것이 알고 싶지?'

조선사절단, 청나라 황제 즉위식서 '절하기' 거부
"명나라 황제만 섬긴다"는 조선, 한 달만에 항복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2) 병자호란과 삼궤구고두례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기적(selfish)’이라는 단어와는 어의가 다릅니다만, 부정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모든 상황을 자기 위주로 판단한다는 뜻이니까요. 최근 어느 신문에 ‘세상만사가 광화문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충분한 정보와 근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객관적 시각을 갖추지 못하고 내리는 결정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요?

“왜 오랑케 국서를 받아왔느냐?”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22) 병자호란과 삼궤구고두례
오늘의 주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1637년 1월)입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바로 그 전쟁입니다. 어떤 사건이 9년 만에 청나라 군대의 재침입을 부른 것일까요. 그것도 황제인 청태종이 직접 군대를 몰고 올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요? 인조 14년(1636)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태종)의 즉위식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청나라 수도인 성경(盛京), 지금 중국 만주 심양(瀋陽)의 황궁입니다. 주변 각국에서 축하 사절을 파견했고 조선은 나덕현, 이확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을 하는 삼궤구고두(三九叩頭禮)를 행했는데, 오직 조선 사절 두 사람만은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명나라 황제만을 인정할 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조선을 떠나기 전 조정으로부터 지침을 받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행동이, 다른 나라의 사절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청나라 황제를 드러내놓고 모욕한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청나라 신하들이 조선 사신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홍타이지는 이들을 용서합니다. 오히려 국서(國書)와 함께 담비가죽, 마필, 은량 등의 귀국선물도 챙겨 보냅니다. 나덕현, 이확은 귀국 후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귀양을 갑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국서의 내용 가운데 ‘조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원본을 폐기하고 사본을 만듭니다. 원문의 내용은 살리되 조선을 비난하는 표현을 순화한 글입니다. 두 사람이 처벌을 받은 이유는 국서를 변조해서가 아닙니다. 조선 조정은 부당한 내용의 국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청나라 황제와 신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 분연히 항의를 했어야 마땅한데 오랑캐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국서를 받아 온 행동 자체가 중죄라는 것입니다.


청나라 사신을 살해한 조선

두 사람의 처벌을 청원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조정의 여론도 한쪽으로 흘렀습니다. 청나라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조선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1632년 인목대비 국상사절로 온 만월개를 냉대했고, 1635년에는 인영왕후 조문사절을 살해하고 추방하는 등 이전부터 청나라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살해 위협을 느낀 청나라 사신이 말을 훔쳐 타고 조선에서 탈출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는 ‘청나라 사신들을 향해 지나가던 아이들이 돌팔매질을 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개인 간의 대화이거나 나라 사이의 협상이거나 상대방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을 일으킨 것은 청나라일까요 조선일까요? 조선이 청나라와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었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경업이 지휘하던 국경의 수비대 정도만 실질적인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 군사력은 청군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청군은 임경업의 주둔지를 우회해서 남하합니다. 파병부터 항복까지 한 달 안에 전쟁이 끝난 것은, 당시의 행군 속도를 감안하면, 전투다운 전투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승부가 갈렸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피신한 남한산성 농성전에서도 조선군이 성 밖으로 나가 청나라 군대와 접전한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무례함을 탓하는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실질적인 전쟁 준비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패전 결과, 나덕현, 이확이 거부했던 삼궤구고두례를 인조가 거행합니다. 높이 쌓아올린 단 위에 앉은 청태종을 향해 신하의 예를 행하는 항복식입니다. 이때의 일을 기록한 비석이 지금 잠실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자리한 삼전도비(三田渡碑)입니다. 패전 결과, 적게는 수 만, 많게는 수 십 만의 조선인이 볼모와 노예로 청나라에 끌려갑니다.

선진문물에 눈 뜬 소현세자 죽음 ‘의문’

숫자에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밀한 통계의 부재, 그리고 노비들을 ‘사람’으로 헤아리지 않았던 당시의 관행입니다. 항복 직후인 1637년 2월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청나라의 베이징 점령 직후인 1644년 가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기고 1645년 2월에 비로소 귀국합니다. 1640년, 44년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일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8년 동안 청나라에 머문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실질적으로 조선을 대변하는 외교관이었습니다. 양국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외에 그가 세자빈 강씨와 심양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며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위해 분투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귀국 직후 사망한 소현세자의 사인(死因)은 인조에 의한 독살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목소리를 높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앞날을 준비하고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비분강개(悲憤慷慨)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