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경제 이야기] 산업혁명, 교육의 또 다른 기능을 부여하는 기회
산업혁명이 경제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시기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해 교육의 기능과 역할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전통적으로 교육은 국가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여 국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기능을 담당하는 데 주력해 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국가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도덕적 기반과 가치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체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기능을 교육이 담당해 왔던 것이다. 교육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 왔던 것은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주요 교육과정이 도덕철학 내지 의례, 예법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던 이유 중 하나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체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이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 의식은 법률, 제도, 문화 등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해당 사회와 국가의 주요 시스템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교육이 담당하는 전통적인 기능 중 또 다른 하나는 복지적 기능이었다. 교육은 국가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 왔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오늘날 직접적인 반대급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학교 내지 교양강좌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유를 떠올려 본다면 교육이 복지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의 기능에 ‘투자적 기능’ 내지 ‘경제적 기능’이 추가되는 계기가 있으니 다름 아닌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은 생산활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농경사회에서도 생산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지식에 비견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생산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교육을 받아야 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생산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기계를 만들거나 다룰 수 있는 공학적 지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공학적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언어, 수학, 기초 과학 등의 기초지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상황은 생산을 위한 대표적인 생산요소에 노동, 자본, 토지에 이어 기술이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기술의 보유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인 교육에 경제적 기능 내지 투자적 기능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교육이 특정 국가의 유지 내지 발전에 있어 경제적 측면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자 많은 근대국가들은 교육을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공교육을 중요시 해왔다. 제대로 교육받은 국민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는 해당 국가의 경제발전의 수준을 좌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가 존립마저 좌우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역사를 살펴보자.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산업혁명의 성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일찍 산업화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보다 더욱 뼈저린 교훈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산업혁명의 위력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공교육의 필요성을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개화기에 몇몇 선각자들은 해외로부터 산업혁명이 가져온 놀라운 성과를 목격하고 이러한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기초 토양을 만들고자 의무교육을 적극 건의한 바 있다. 바로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의무교육 실시를 적극 건의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교육을 의무로 규정한 바 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임시헌장을 발표했는데, 이때 6조에 ‘대한민국 국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일제시대에는 성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일본은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철저히 차단해 왔다. 이로 인해 산업현장에서도 중간 직급 이상은 언제나 일본인이 수행하였고,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단순 반복 업무 내지 말단 업무에만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따라서 조선인에게는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으며, 일본은 조선에 고등교육기관 설립에 소극적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한정적으로만 허용하였다. 해방 이후 전국 성인 문맹률이 78% 수준에 달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간 동안 조선인이 교육 환경으로부터 얼마나 철저히 소외되어 왔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우리 정부는 그 무엇보다 공교육 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1950년 4월 25일에는 ‘문맹퇴치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문맹 퇴치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1945년에는 78%였던 비문해율이 1958년에는 4% 수준까지 낮아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맹퇴치와 함께 학령기 아동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59년에는 아동 취학률이 96%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보편교육 과정의 확립과 함께 고등교육의 기능 또한 강화하였다. 광복 즈음에는 국립대학 1개, 전문학교 18개로 고등교육기관은 19개에 불과했으며, 이들 학교에 재직 중인 한국인의 숫자 역시 8천명이 채 되지 못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우리 정부는 교육에 그 무엇보다 적극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3년여의 기간 동안 고등교육기관은 31개로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들 기관의 학생 수 역시 2만 여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상에서 설명한 사실을 종합할 때,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간 동안 교육이 내포하고 있는 경제적 기능, 투자적 기능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이후 정부가 보인 공교육 체계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이에 부응하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어쩌면 일제 강점기 기간으로부터 얻은 값비싼 교훈 때문일 것이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