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 '아라사'와 '독일', 닮은 듯 다른 음역어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배시원 쌤의 신나는 영어여행
지난 회에서 살폈듯이 ‘러시아’는 우리말 진화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표기로 등장한다. 중국에서 음역한 아라사(俄羅斯)나 일본의 로서아(露西亞) 이전엔 ‘나선(羅禪)’으로도 불렸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나선정벌(羅禪征伐)’의 ‘나선’이 러시아를 뜻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나선정벌을 ‘조선 효종 5년(1654)과 9년(1658)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친 싸움’으로 풀이한다. ‘羅禪’은 중세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 ‘루스(Rus)’를 음역한 것이다. 중국어사전에는 羅禪이 ‘러시안(Russian)의 한자음’으로 올라 있는데 발음은 [뤄산]쯤 된다. 그것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게 ‘나선’이다.

과거 러시아가 중심이 됐던 ‘소비에트 연방’을 줄여 ‘소련(蘇聯)’이라 부른 적도 있다. 이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소비에트(Soviet)란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이 소비에트의 머리글자를 취음한 한자 ‘소(蘇)’와 연방의 ‘련(聯)’을 합성해 만든 게 ‘소련’이었다. 지금은 말의 대상이 해체돼 없어지면서 단어의 세력도 점차 약해져 가는 중이라 하겠다.

아라사를 비롯해 노서아, 나선, 소련 따위의 말은 지금은 효용성을 거의 잃었지만 우리말 한 귀퉁이엔 그 흔적이 지금도 화석처럼 남아 있다. 잘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아라사버들’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이는 아주 곧고 뻣뻣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에 비해 ‘독일, 미국, 영국’ 같은 말은 같은 경로로 만들어졌지만 그 생명력에서 차이가 있다. ‘독일(獨逸)’ 역시 일본에서 도이칠란트(Deutschland)를 취음해 만든 단어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때 나온 국내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말은 일본인이 도이칠란트의 앞 글자(Deutsch)를 취해 ‘獨逸’로 적고 [도이쓰]라고 읽은 데서 연유했다. 이를 한국 음으로 읽은 게 ‘독일’이다. 도이칠란트가 우리나라에선 실제 발음과 전혀 다른 ‘독일’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중국에선 이를 ‘德意志[더이즈]’라고 취음해 썼는데 예전에 우리도 이를 줄여 ‘덕국(德國)’이라 부르기도 했다.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배시원 쌤의 신나는 영어여행
미국(美國)이란 말은 ‘America’에서 왔다. 중국에서 이를 음역해 亞美利加로 적고, 줄여서 ‘美國’이라 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米國’으로 취음했는데 우리나라도 초기엔 두 말을 혼용해 쓰다 곧 美國으로 통일됐다. 영국이란 단어의 연원은 England다. 중국어사전에는‘英格蘭’으로 나온다. 중국에서 [잉거란] 정도로 취음한 말의 첫 글자 ‘英’에 ‘나라 國’을 붙여 한국 음으로 읽은 게 영국이다. 이를 ‘영’과 ‘란’만 따서 ‘영란’이라고도 했는데 지금도 언론에서 간혹 쓰는 ‘영란은행’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잉글랜드은행, 즉 영국의 중앙은행을 이르는 말이다. 외래어 표기법이 자리 잡은 지금은 잉글랜드를 ‘영란’이라 하지 않으므로 영란은행 역시 쓰지 말아야 할 말이다. 잉글랜드은행, 또는 영국 중앙은행이라 하면 된다.

외래어를 한자어 차음으로 표기하던 것은 과거의 낡은 방식이다. 지금은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으면 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 독일, 영국 같은 단어는 우리말 안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린, 특이한 위치에 있는 말들이다. 그에 비해 아라사를 비롯해 화란(네덜란드)이니 나성(로스앤젤레스)이니 하는 대부분의 취음어는 이미 세력을 잃었다. 그것은 단어들 간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언중이 선택한 결과다.

☞다음회에 계속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배시원 쌤의 신나는 영어여행 - A novel idea는 '참신한 생각'sophisticated는?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배시원 쌤의 신나는 영어여행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부푼 꿈을 안고 새로운 학교에서, 또 새로운 학년에서 수업을 받을 텐데 다들 아시는 것처럼 ‘새로운’은 영어로 new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설’이라고만 알고 있던 단어 novel에도 ‘새로운’ ‘참신한’이란 뜻이 있답니다. 생각해보면 ‘소설’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가리키는 단어잖아요? 그래서 a novel idea가 ‘참신한 생각’이고, a novel design이 ‘기발한 디자인’이란 뜻이 되는 것이랍니다. 참고로 ‘초보자’를 뜻할 때 beginner 대신 novice란 단어를 쓸 수 있답니다.

freshman 역시 ‘초보자’란 뜻을 가진 단어인데, (대학교) ‘1학년’을 뜻하기도 한답니다. 생각해보세요. 1학년들에게는 ‘신선하고 풋풋한 느낌’이 있잖아요. 반대로 4학년은 senior라고 합니다. 그 학교의 최고 연장자를 가리키는 단어지요. 그래서 3학년은 junior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꼭 3학년이라기보다는 senior라고 한 학년 아래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2년제 학교라면 senior가 2학년이 되고, junior가 1학년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2학년은 영어로 무엇일까요? sophomore란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가 만들어진 원리가 상당히 재밌습니다. ‘지혜’를 뜻하는 sophia와 ‘어리석음’을 뜻하는 moronity가 합쳐졌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서 지혜롭지도, 어리석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를 나타내는 ‘2학년’이란 단어가 되었다고 하네요.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배시원 쌤의 신나는 영어여행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궤변론자’라고 배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sophist라고 하고(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도 잘 할 테니), sophisticated를 주로 ‘정교한’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그래서 sophisticated가 ‘학문 교양이 있는’이란 좋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순진하지 않은’이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답니다. 또, sophomoric이란 단어는 ‘아는 척하는’이란 뜻으로 번역되는데, 특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건방진 사람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단어랍니다.

참고로 미국 고등학교들이 4년제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freshman, sophomore, junior, senior가 고등학교 1, 2, 3, 4학년을 뜻하기도 한답니다. 예전에 ‘Friends’란 미드에서 주인공 모니카가 senior(고등학교 4학년)를 ‘대학교 4학년’으로 착각해서 데이트를 했던 아찔한(?)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있는데, 역시 언어는 참 미묘한 것 같습니다~^^*

■ 배시원 선생님

배시원 선생님은 호주 맥쿼리대 통번역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배시원 영어교실 원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등 대학과 김영 편입학원, YBM, ANC 승무원학원 에서 토익·토플을 강의했다.